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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지분류기에 맡긴 국민주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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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방현 기자 중앙일보 내셔널부장
김방현 대전총국장

김방현 대전총국장

지난 4월 15일 충남 부여군 개표소에 있던 참관인들은 개표과정에서 이상한 장면을 봤다고 중앙일보에 증언했다. 이들은 “투표지분류기(전자개표기)를 통과하면 1번 후보 표가 지나치게 많이 나오거나 2번 후보 표는 재확인용(미분류표)으로 분류되는 게 많았다”고 했다. 재검표를 요구해 분류기를 다시 돌리면 1번과 2번 후보 투표지 집계 결과가 역전되기도 했다고 했다. 선관위는 “투표용지는 기표 행태가 천차만별이어서 재확인용으로 분류될 확률이 20% 이상 높아지기도 하며 분류기에는 이상이 없다”고 해명했다. 〈5월 14일 중앙일보 온라인 보도 “부여개표소 분류기 이상했다” 선관위 “기계 이상 없다”〉서울 성북구에서는 분류기가 1810표를 1680표로 인식하기도 했다.

지난달 28일 중앙선관위가 개표 공개 시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중앙선관위가 개표 공개 시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총선 만큼 투·개표 과정에서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자주 나온 적은 없는 것 같다. 대전 동구에서는 투표함의 봉인지를 떼었다 붙인 흔적과 투표함 잠금장치가 해제된 게 발견됐다. 참관인들은 개표 전에 누군가 투표함에 손을 댄 것이라며 항의했지만, 선관위는 “보관상 실수”라고 했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선관위에서는 비례대표 관내 사전투표 선거인 수가 4674명인데 실제 투표자는 4684명으로 10표가 더 많이 나왔다. 선관위는 “다른 곳에서 섞였다”라고 했다. 이번에 사전선거 투표용지에 QR코드를 사용했는데, 이는 공직선거법(151조) 위반이다.

이보다 더 이상한 건 국민적 무관심이다. 납득하기 힘든 장면이 수없이 나와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내가 던진 소중한 한 표’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궁금해하지 않는 모습이다. “설마 전자개표기에 오류가 있겠나”라는 신념 체계는 굳건하다.

하지만 이번에 제기된 여러 의심의 중심에는 투표지분류기가 있다. 노트북 컴퓨터와 일체형인 분류기는 초당 5.66장(분당 340장)의 투표지를 처리한다. 참관인들은 “분류기 속도가 엄청 빨라 처리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게다가 “개표장에 사람은 많지만, 개표 과정을 주의 깊게 보는 이는 드물다”라는 증언도 잇따른다. 분류기는 내장된 프린터를 통해 개표상황표까지 출력하는 능력도 갖췄다. 선관위 주장대로 ‘단순히 숫자만 세는 기계’라고 보긴 어렵다. 분류기는 2002년 6월 도입됐다. 이후 언론도 개표 현장 취재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투표가 끝나면 TV 앞에 앉아 출구 조사결과를 기다린다.

이제 20년 가까이 분류기에 맡겨둔 국민의 권리를 점검할 때가 왔다. 궁금한 것을 말하고 해명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해명할 책임은 선관위에 있다. 선거가 국민 누구나 참여하는 공공 행사이기에 더욱 그렇다. 알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릴 때 우리 스스로 무력해진다.

김방현 대전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