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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감자가 유재수 살렸다···구속된 이동호에겐 없던 이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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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4200여만원의 뇌물 수수가 인정됐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난 유재수(56)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의 판결문(손주철 재판장)엔 '친분'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같은 날 9400여만원을 수수해 징역 4년이 선고된 이동호(54) 전 고등군사법원장 판결문(손동환 재판장)에선 찾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유재수 집유·이동호 4년, 수천만원 뇌물에 왜 다른 판결이

지난해 11월 동부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는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의 모습. 유 전 부시장은 지난 22일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구속상태에서 석방됐다. [뉴스1]

지난해 11월 동부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는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의 모습. 유 전 부시장은 지난 22일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구속상태에서 석방됐다. [뉴스1]

받은 액수의 차이와 이 친분은 수천만원의 뇌물을 받은 두 전직 고위공직자에게 전혀 다른 형량이 선고된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검찰은 유 전 부시장 재판부가 '봐주기 판결'을 했다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까운 사이면 뇌물을 받고도 감형이 될 수 있을까요.

유 전 부시장에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 판결문엔 그에게 뇌물을 준 금융업체 인사 4명(A,B,C,D)과 유 전 부시장의 관계가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뇌물공여자와 유재수의 관계 (판결문 中)

①A는 피고인(유재수)를 형님이라 칭했고 피고인 가족 위주로 진행된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피고인은 아버지의 제철농산물을 A에게 보내주었다.
②B는 피고인을 자신의 칠순 잔치에 초대했고 자녀들과 모임을 가졌으며 피고인은 아버지의 제철 농산물을 B에게 보내주었다.
③C는 피고인 가족 위주로 진행된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피고인은 아버지의 제철농산물을 C에게 보내주었다.
④D는 피고인과 주말에 골프를 쳤고 피고인은 아버지의 제철농산물을 D에게 보내주었다.

지난해 10월 부산시청에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부산시 국정감사에서 당시 현직이던 유재수 경제부시장이 야당 의원에 질문에 답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지난해 10월 부산시청에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부산시 국정감사에서 당시 현직이던 유재수 경제부시장이 야당 의원에 질문에 답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수천만원을 줄만큼 가까운 사이였나  

네 사람은 모두 유 전 부시장이 행정고시에 합격해 금융 공직을 맡은 뒤부터 친분을 쌓았습니다. 고향 친구나 학교 친구는 아닙니다. 1996년부터 알게 된 관계(B씨)부터 박근혜 정부 때 인연을 맺고 '형님, 동생'한 사이(A씨)도 있습니다. 모두 유 전 부시장 아버지가 농사를 지은 옥수수와 감자 등을 받았습니다.

재판부는 네 사람이 2010~2017년 사이 유 전 부시장에게 총 4200여만원의 뇌물을 줬다고 인정했습니다. 공소시효가 지난 뇌물액을 제외하고 A의 뇌물액은 1500여만원. B는 2280여만원. C는 150여만원. D는 270여만원입니다. 주로 유 전 부시장이 먼저 요구했고, 일부 뇌물은 장모의 계좌로도 받았습니다.

뇌물의 종류는 아내에게 줄 골프채부터 청담동 오피스텔, 미국행 항공권, 강남 아파트 구입을 위한 수억원의 무이자 차용까지 다양했습니다. 정원이 198명인 금융위원회의 요직을 거친 유 전 부시장의 요구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유 전 부시장의 재판부는 "유 전 부시장이 이런 관계에서 선의로 금품을 받았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며 친분을 감형 사유로 삼았습니다.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청와대 감찰을 무마했다는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해 12월 서울동부지법에서 열린 영장심사에 출석하던 모습. 당시 영장은 기각됐다. [연합뉴스]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청와대 감찰을 무마했다는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해 12월 서울동부지법에서 열린 영장심사에 출석하던 모습. 당시 영장은 기각됐다. [연합뉴스]

하지만 검찰 측은 "이들은 유 전 부시장과 나이차이가 많아 친구로 지내긴 어려운 사이였다"고 반박합니다. 실제 1996년부터 유 전 부시장과 알아온 B씨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검찰과 법정에서 "금융업을 하다 일이 생기면 도움을 받을 것이라 기대했다""유재수에게 잘 보여 도움을 받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B씨는 법정에서 "피고인과 가족같은 관계다. 순수한 마음으로 줬다"고 증언했습니다. 부장판사 출신인 도진기 변호사는 "고위 공직에 오른 뒤 알게 된 사람들을 진정한 친구라 볼지는 재판부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라 지적합니다.

전 軍법원장을 형님이라 부른 납품업자  

군 납품업체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받은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이동호 전 고등군사법원장의 판결문에도 친분을 드러내는 '형님'이란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에게 뇌물을 준 납품업자들이 그에게 "형님, 군납 좀 잘 부탁드린다"며 돈을 건넸기 때문입니다. 판결문엔 그가 "응 고마워"라고 답한 내용도 나옵니다.

지난해 11월 뇌물수수 혐의로 영장실짐심사 출석하는 이동호 전 고등군사법원장의 모습. 이 전 법원장은 구속됐고 22일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뇌물수수 혐의로 영장실짐심사 출석하는 이동호 전 고등군사법원장의 모습. 이 전 법원장은 구속됐고 22일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하지만 이 '형님·동생 대화'는 이 전 군사법원장에게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그가 뇌물수수를 인식한 증거가 됐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관계가 2015년부터 맺어져 친분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다음은 판결문에 기재된 뇌물 공여자 장모씨와 이 전 군사법원장의 텔레그램 대화 중 일부입니다.

이 전 군사법원장과 뇌물 공여자의 대화(판결문 中)

이 전 군사법원장(이)=형한테 돈 준 것 이야기하지 마라. 뇌물공여도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고 구속된다…휴대전화 압수수색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군납업체 관계자(E)=(앞선 대화 생략) 아무튼 무탈하십시오.
이=그려, 고마우이.

이 전 군사법원장의 재판부는 이 대화에 대해 "법률전문가인 피고인이 돈을 받을 것을 인정하고 그 성격을 뇌물로 표현해 (돈을 줬다는 뇌물공여자의 진술의) 신빙성이 높다"고 밝혔습니다. 이 전 법원장도 유 전 부시장과 마찬가지로 일부 뇌물을 가족의 계좌로 받았습니다. 지청장 출신 변호사는 "마지못해 받은 것이 아닌 먼저 돈을 요구한 두 사람은 죄질이 매우 나쁘다"고 지적했습니다.

지난해 11월 동부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는 유재수 전 부시장의 모습. [뉴스1]

지난해 11월 동부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는 유재수 전 부시장의 모습. [뉴스1]

쪼개서 받은 뇌물에 특가법 빠졌다  

유 전 부시장이 여러 사람에게 뇌물을 쪼개 받은 것도 그가 집행유예를 받은 이유가 됐습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특가법)'에 따르면 한 사람에게 받은 뇌물액이 3000만~5000만원인 경우 5년 이상의 징역을, 5000만~1억인 경우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합니다.

이 전 군사법원장은 군 납품업체로부터만 5910만원을 받아 7년 이상 특가법 적용 대상입니다. 반면 유 전 부시장은 네 사람으로부터 각각 3000만원 이하의 뇌물을 받아 전체 수뢰액이 4000만원을 넘어도 특가법 대상에서 빠지게 됐습니다. 한 사람에게 3000만원 이상을 받지 않으면 일반 뇌물죄(5년 이하)가 적용됩니다. 형량이 'O년 이상'의 경우 재판부는 최대 절반까지만 깎아줄 수 있지만 'O년 이하'의 경우 재판부는 그 안에서 재량껏 선고할 수 있습니다.

법조계에선 유 전 부시장에 대한 감형이 지나쳤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검사 출신 변호사는 "여러 명에게 돈을 나눠 받은 것은 유 전 부시장의 준법의식이 부족하단 뜻일 수도 있다"며 "고위 공직자였고, 돈을 먼저 요구했으며, 총액이 4000만원을 넘어 실형을 선고할 가중사유가 여럿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부패전담부 재판을 맡았던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도 "현직 시절 공무원 뇌물범죄의 실형 기준을 1000만~2000만원 사이로 잡았다"며 "납득하기 쉽지는 않은 판결"이라 말했습니다.

검찰이 지난해 유 전 부시장을 기소할 당시 5000만원에서 50만원 부족한 4950만원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한 것을 두고 '봐주기 기소'였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법원은 검찰이 주장한 액수보다 더 적은 금액을 뇌물로 인정했습니다. 검찰은 1심 판결에 항소할 방침입니다.

박태인·이수정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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