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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경 첫 우승 "고진영 언니의 '우승하지 마' 조언이 도움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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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경. [뉴스1]

박현경. [뉴스1]

동료들은 우승자에게 물 대신 장미꽃잎을 뿌려줬다. 가까이서 물을 뿌리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번질까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터뷰를 할 때 우승자의 얼굴은 마치 물을 뿌린 것처럼 흠뻑 젖었다. 눈물을 철철 흘렀다.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증 사태 이후 열린 첫 골프 대회에서 박현경(20)이 우승했다. 박현경은 17일 경기 양주의 레이크우드 골프장에서 벌어진 KLPGA 챔피언십 최종라운드에서 5언더파 67타를 쳐 합계 17언더파로 친구 임희정(20)에 역전승했다. 아마추어 시절 대형 유망주로 꼽히던 박현경의 프로 첫 우승이다.

그의 아버지 박세수(52)씨는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선수 출신이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노력파였지만 불운했다. 골프를 늦게 시작했고, 왼손잡이였다. 당시 왼손 클럽, 왼손 타석도 없었고 왼손잡이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없었다. 오른손으로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박세수씨는 “1980년대엔 왼손으로 치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다. 돌아보면 오른손으로 친 걸 후회한다. 왼손잡이가 오른손으로 치니 자연스럽지 않았고 컨디션에 따라 스윙 변화가 심했다”고 회상했다.

박세수씨의 우승은 딱 한 번이다. 1999년 KPGA 2부 투어 대회에서다. 그 우승 후 넉 달 뒤에 박현경이 태어났다. 미국 LPGA 2부 투어에 진출한 홍예은의 아버지 홍태식(51)씨는 “박세수씨는 주니어 선수 부모 중 가장 성심성의껏 아이를 가르치는 분”이라고 했다.

박현경은 공을 잘 쳤다. 국내 72홀 최소타 기록이 그의 것이다. 2017년 송암배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무려 29언더파 259타를 쳤다. 2위 보다 8타를 앞섰다. 1년 전 최혜진이 세운 대회 최소타 우승 기록(16언더파)은 13타 넘어섰다.

프로에서도 잘 할 걸로 기대됐다. 그러나 지난해 조아연, 임희정에 이어 신인상 부문 3위에 그쳤다. 우승을 못해서다. 기회는 많았다. 지난해 최종전 ADT캡스 챔피언십에서 우승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마지막 날 1타 밖에 줄이지 못해 공동 3위에 머물렀다. KB금융 챔피언십에서도 마지막 날 75타를 치는 바람에 8위로 밀려났다. 하이원 챔피언십에서는 마지막 날 73타를 쳐 4위에 그쳤다. 그 때 우승은 친구인 임희정이 차지했다.

박현경은 “동기 선수들 우승이 부러웠고 속도 상했다. 작년 루키 우승이 8번이나 됐는데 내 것이 없어 아쉬웠다”고 했다. 박세수씨의 마음은 더 아팠다. 박현경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스폰서는 1년 만에 떠나갔다.

박현경 [뉴스 1]

박현경 [뉴스 1]

이번 대회는 무관중으로 치렀다. 지난해 우승 기회를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했던 박현경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압박감, 실패의 두려움 등이 상대적으로 덜 할 수 있다. 박현경은 “아마추어와 2부 투어에서 경기할 때 관중이 없는 것이 익숙해 부담이 없었다”고 말했다.

박현경은 3타 차 공동 2위로 최종라운드를 시작했다. 2, 3라운드에서 무려 15타를 줄인 선두 임희정은 3번 홀까지 버디 2개를 잡아 5타 차로 달아났다. 박현경은 포기하지 않았다. 4번홀 버디로 분위기를 바꾸고 6, 7번홀에서 다시 버디를 잡았다. 박현경은 11~13번 홀 연속 버디로 2타 차 선두로 나섰다.

임희정이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흔들리던 아이언의 영점을 잡고 15번홀 버디로 한 타 차로 따라붙었다. 박현경이 지켜내는가 아닌가의 싸움이었다. 박현경은 17번 홀에서 어렵지는 않지만, 실패하면 망신스러운, 그래서 종종 실수가 나오는 1m가 약간 넘는 퍼트를 남겼다. 그러나 침착하게 마무리했고 사실상 경기를 끝냈다.

박현경은 “많이 꿈꿔왔던 순간이 왔다. 1라운드날 엄마 생신이어서 좋은 선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걸 이뤘다.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안 풀릴 때 캐디를 하신 아버지의 도움이 컸다. 또 고진영, 이보미 선배와 전지훈련을 하면서 멘탈이 많이 좋아졌다. 고진영 선배는 어제 나에게 전화해 ‘우승하지 말라’고 하더라. 욕심을 내지 말라는 말이었다. 우승하려는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영역 말고는 다 하늘에 맡기라는 말이었다”고 전했다.

양주=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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