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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열린당과 다를까…179석 巨與 '손바닥의사봉' 나오면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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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79석 진보 여당의 시대가 시작된다

수식어는 압도적, 전례없는, 역대급, 초유의, 기록적 같은 말들이었고, 꾸밈을 받는 말은 강한 정부, 초거여(超巨與), 슈퍼여당 등이었다. 179석(180석이었지만 양정숙 당선인 제명) 여당을 탄생시킨 4·15 총선 이튿날, 여러 언론이 뽑은 헤드라인 얘기다.

협상보다 숫자의 힘에 기댔고 #귀 닫은 채 조급하게 밀어붙여 #민자당 14대 총선서 과반 실패 #열린우리 ‘사학법’ 뒤 선거 4연패 #민주당, 개헌 빼고 다 할 수 있다? #입법순위 정하고 야당 협조 구해야

이달 말이면 20대 국회가 끝나고 21대 국회가 시작된다. 더불어민주당 123석, 새누리당 122석으로 분산됐던 20대 국회와 여당 179석, 제1야당 103석인 21대 국회는 분명 다를 테다. “개헌 빼고 다 할 수 있다”거나 “주요 법안과 예산안을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다” 같은 설명이 있지만, 임기 4년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기 어렵다.

이럴 때 참고할 만한 게 앞선 경험, 즉 역사다. 민주당을 규정하는 ‘179석의 진보 여당’과 꼭 닮은 경우는 없다. 하지만 179석이란 숫자는 218석을 가졌던 1990년의 민주자유당과, ‘과반의 진보 여당’이란 정체성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152석의 열린우리당과 견줘볼 수 있다.

두 선례(先例)엔 공통점이 있었다. 협상보다 숫자의 힘에 기댔고, 귀를 닫은 채 밀어붙였으며, 종국엔 분열했다. 총선 승리 일성으로 “열린우리당을 반면교사해야 한다”던 이해찬 대표의 말마따나, 다수파가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총재 노태우 대통령)·통일민주당(총재 김영삼)·신민주공화당(총재 김종필)이 합당해 218석의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중앙포토]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총재 노태우 대통령)·통일민주당(총재 김영삼)·신민주공화당(총재 김종필)이 합당해 218석의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중앙포토]

‘거여(巨與) 국회가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30년 전인 1990년 3월 13일 중앙일보 2면 머리기사의 첫 문장입니다. ‘거여’란 그해 1월 22일 ‘3당(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을 일컫습니다. 13대 국회 전체 의석수(299석)의 72.9%(218석)를 차지한, 말 그대로 거대 여당이었죠. 합당 전까지 제1야당이었던 김대중(DJ)의 평화민주당은 한순간에 유일한 소수야당으로 전락했습니다.

1990년 3월 12일 오후 국회 국방위에서 의사봉을 빼앗긴 유학성(민주자유당·왼쪽) 국방위원장이 국군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 손으로 가결을 선포하려고 하자 평민당의 권노갑, 정웅 의원이 손을 내밀어 이를 저지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0년 3월 12일 오후 국회 국방위에서 의사봉을 빼앗긴 유학성(민주자유당·왼쪽) 국방위원장이 국군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 손으로 가결을 선포하려고 하자 평민당의 권노갑, 정웅 의원이 손을 내밀어 이를 저지하고 있다. [중앙포토]

기사에서 언급한 ‘거여의 실체’란 곧 ‘날치기’였습니다. 반대파의 반발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수(數)의 힘으로 밀어붙였습니다. 합당 잉크도 채 마르지도 않았을 90년 3월, 국회 국방위에서 민자당의 날치기가 첫선을 보입니다. 국방참모본부(현 합동참모본부) 설치를 골자로 한 국군조직법 개정안 처리 과정에서 유학성(민자당) 위원장이 야당 의원들에게 의사봉을 빼앗기자 손바닥으로 나무판을 두들겨 가결을 선포한 것이죠.

그해 7월 열린 본회의에선 평민당이 의장석을 점거하자 민자당 소속이던 김재광 국회 부의장이 의원석에서 무선 마이크로 사회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쟁점 법안을 포함한 27개 안건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데는 채 2분도 걸리지 않았고요. 이때 평민당 정책실장이었던 한화갑 전 민주당 의원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218석의 민주자유당이 26개 법안을 포함한 27개 쟁점 안건을 본회의에서 날치기한 1990년 7월 14일 당시 석간이던 중앙일보 1면. [중앙포토]

218석의 민주자유당이 26개 법안을 포함한 27개 쟁점 안건을 본회의에서 날치기한 1990년 7월 14일 당시 석간이던 중앙일보 1면. [중앙포토]

”협상 자체가 안 되니까 몸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어요. 싸울 여력이 없으니까…. 동정심을 유도해보려고 생각할 정도로, 아주 절망적인 상태였지요.”

민자당은 ‘거여의 폭주’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91년 5월 10일 국가보안·경찰법 수정안의 날치기 때도 무선 마이크가 등장해 35초 만에 ‘일’을 끝냈고요, 11월 25~27일 각 상임위에선 ▶여야 총무(원내대표) 회담 중 기습 처리 ▶사우나로 야당 의원 유인한 뒤 처리 ▶야당에 회의 소집 통보하지 않은 채 단독 처리 같은 방법을 동원하며 날치기 처리를 이어갔습니다.

2004년 12월 6일 오후 국회 법사위의 위원장석에서 열린우리당 간사인 최재천 의원(왼쪽)이 국회법안 책자를 손에 들고 책상을 치면서 개회 및 산회를 선언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4년 12월 6일 오후 국회 법사위의 위원장석에서 열린우리당 간사인 최재천 의원(왼쪽)이 국회법안 책자를 손에 들고 책상을 치면서 개회 및 산회를 선언하고 있다. [중앙포토]

30년 전 얘기로, 민주주의가 덜 성숙해서 벌어진 촌극 아니냐고요? 21세기, 진보 과반 정당 때도 날치기를 위해 의사봉 대신 손바닥을 두드린 전례가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집권 2년 차이자, 열린우리당이 과반(152석)으로 이겼던 17대 총선이 치러진 2004년의 일입니다. 이념 대립에 불을 댕겨온 국가보안법 폐지가 이슈였습니다.

2004년 총선 직후 여야는 일부 독소조항을 수정하는 정도로 국보법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그해 9월 5일 “보안법은 폐기돼야 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에 강경파 초선들이 동조했고, 9일 당 의원총회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법률인 보안법을 고수하는 사람은 민주주의를 거론할 자격이 없다”(천정배 원내대표)는 논리로 ‘국보법 폐지’는 당론이 됩니다.

2004년 9월 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정책의원총회에 참석한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회의자료를 보고 있다. 앞줄 왼쪽 세 번째가 임종석, 오른쪽 첫번째가 정청래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 [중앙포토]

2004년 9월 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정책의원총회에 참석한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회의자료를 보고 있다. 앞줄 왼쪽 세 번째가 임종석, 오른쪽 첫번째가 정청래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 [중앙포토]

야당이던 한나라당의 강한 반발에 막히자 열린우리당도 손바닥을 씁니다. 그해 12월 6일 법사위에서 한나라당 소속 최연희 법사위원장이 개의를 거부하자, 열린우리당 간사였던 최재천 의원은 “국회법 50조 5항에 따라 여당 간사인 제가 위원장을 대신한다. 국보법 폐지 법률안 2개 안과 형법 개정안(국보법 보완안)을 상정한다”며 손바닥으로 위원장석 책상을 두드린 뒤 “산회를 선포한다”고 말하곤 퇴장했습니다.

하지만 적법성과 유효성 논란이 일었고, 여론도 심상찮자 천 원내대표는 “연내 처리 유보”를 선언했습니다.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임채정 전 국회의장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점진적으로 개정하자고 했으면 가능했을 거예요. 역사적 경험이 있는 중진 의원들이 그렇게 초선들을 다독였는데, 꺾지 않고 밀어붙였어요. 그런 점에서 당 전체가 하나 돼 가는 것부터 부족했던 셈이고, 초선들에 떠밀려 가다가 잘 해결되지 않은 것은 맞아요.”

열린우리당 정동영(앞줄 왼쪽 세 번째) 의장과 지도부가 2004년 4월 19일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17대 총선 당선자대회에서 당선 축하 박수를 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열린우리당 정동영(앞줄 왼쪽 세 번째) 의장과 지도부가 2004년 4월 19일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17대 총선 당선자대회에서 당선 축하 박수를 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열린우리당은 숫자의 힘에 기대기도 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귀를 닫아버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보 과반 여당’으로서 자신을 스스로 '절대선'으로 규정한 뒤 밀어붙이려다 역풍을 맞았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습니다. 17대 총선 승리 직후 열린우리당 초선들 사이에선 이런 정서가 다분했습니다.

“이념 정당을 지양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념이란 게 나쁜 것인가.”(정청래)
“혁명이 성공했으면 혁명 정권이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임종인)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 등 당내 개혁당 출신 그룹과 신당 추진위 당선자들이 2004년 5월 6일 국회에서 첫 공식모임을 갖고 원내대표 경선 등 독자세력화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 등 당내 개혁당 출신 그룹과 신당 추진위 당선자들이 2004년 5월 6일 국회에서 첫 공식모임을 갖고 원내대표 경선 등 독자세력화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그해 5월 원내대표 선거에서 ‘중도진보’를 표방한 천정배 의원이 ‘중도보수’를 내건 이해찬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며 당의 노선이 ‘진보·개혁’ 쪽으로 정해집니다. 곧이어 등장한 게 이른바 ‘4대 개혁입법(국보법·과거사법·신문법·사립학교법 개정안)’입니다. 야당의 반발을 초래할 입법안을 17대 국회 출범 초기부터 전면에 세웠고, 과반 의석으로 밀어붙이려던 겁니다. 2007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장영달 전 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수십 년 찌들어 온 군사정권 문화와 독재정권에서 누적된 모순을 DJ 정부 때 다 털어내지 못했습니다. 의석수도 과반이 안 됐고. 그러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고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돼 정권의 지속성을 갖게 되니까 ‘이제 못하면 언제 할 것이냐’하는 조급증이 강했죠.”

‘손바닥 의사봉’이 상징하는 민자당과 열린우리당의 일방통행은 유권자에 의해 제동이 걸립니다. 선거로 폭주를 심판한 겁니다.

황낙주 국회 부의장이 1993년 12월 2일 밤 민주자유당 의원들의 호위속에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와 예산안 날치기 통과를 시도하자 최재승 의원 등 민주당 의원들이 황 부의장의 입을 틀어막으며 육탄으로 저지하고 있다. [중앙포토]

황낙주 국회 부의장이 1993년 12월 2일 밤 민주자유당 의원들의 호위속에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와 예산안 날치기 통과를 시도하자 최재승 의원 등 민주당 의원들이 황 부의장의 입을 틀어막으며 육탄으로 저지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자당이 과반 확보에 실패(149석)한 뒤, 이듬해 민자당 출신인 이만섭 국회의장은 “날치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해 12월 예산안을 날치기 처리하려던 황낙주(민자당) 부의장이 “본회의를 개회합니다. 의사일정…”까지 말하다 야당 의원들에 의해 멱살을 잡힌 채 끌려 내린 장면은 민자당의 몰락을 상징합니다.

열린우리당은 2005년 12월 사학법 개정안을 날치기 처리하는 초강수를 둔 뒤 급격히 쇠락했습니다. 이듬해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 참패 등 17대 총선 뒤 치러진 각종 선거에서 내리 여덟번을 졌습니다. 이후 차기 대선 주자를 둘러싼 당내 세력 분열로 원심력이 커지면서 당은 해체됐습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가 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1년 간 원내대표직을 수행한 이인영 원내대표에게 감사의 꽃다발을 전달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가 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1년 간 원내대표직을 수행한 이인영 원내대표에게 감사의 꽃다발을 전달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179석의 거여로 거듭난 현재 더불어민주당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에 따른 경제 위기 극복에 당력을 집중한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179석이란 의석수가 유권자의 선택인 만큼, 앞으로는 청와대·정부보다는 당에서 정국 주도권을 쥐고 가겠다는 의지도 강합니다.

이미 일부 초선 당선인과 중진 의원 사이에서 각양각색의 개헌론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 후반기 집권여당이 추진할 과제도 줄줄이 대기 중입니다. ▶법원행정처 폐지, 사법행정회의 설치, 법관 탄핵 등 법원개편 ▶검찰의 직접수사 범위 감축 ▶국가수사본부 설치, 자치경찰제 실시 등 경찰개편 ▶대공수사권 폐지 등 국가정보원 개편 등 20대 국회에서 띄우고 뒤로 미뤘던 과제들도 있습니다.

7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21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제1기 원내대표 선출 당선인 총회에서 원내대표로 당선된 김태년 후보(가운데)가 전해철·정성호 후보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7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21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제1기 원내대표 선출 당선인 총회에서 원내대표로 당선된 김태년 후보(가운데)가 전해철·정성호 후보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국회는 ‘거여’였을 때 충돌했고, ‘거야’였을 때는 충돌하지 않았어요. 다수의 횡포는 결국 정권교체로 이어졌어요. 결국, 국민들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겠죠.”(한화갑 전 의원)

슈퍼 여당이 민생과 개혁 이슈 사이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야당의 협조를 어떻게 끌어내느냐에 따라 과거 ‘거여’의 전철을 밟을지, 그간 못 본 새로운 ‘거여’가 될지 판가름날 거란 얘깁니다.

권호·윤성민·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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