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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투표소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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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주변에 회의론자가 많다. 며칠 전 만난 한 지인은 “거대 양당의 기득권 주고받기에 신물 난다. 진짜 새 정치가 필요하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이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고 말했다. 그의 선택은 아마도 소수정당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또 다른 지인은 “어차피 선거란 최선 아닌 차악”이라는 쪽이다. ‘A가 좋아서 찍나. B가 싫어서 A를 찍지’ 혹은 ‘A도 나쁘지만 B가 더 나쁘니 A를 찍는다’는 식이다.

정치혐오 뚫고 한 표 행사하는 날 #매번 차악 택하는 유권자의 고심 #정치권은 반사이익 의미 새겨야

후자의 선택은 우리 사회 지배적 투표 패턴이다. “한국이나 미국 같은 다수대표제·양당제 국가에서 정치혐오와 더불어 나타나는 ‘반감의 정치’ ‘응징의 정치’ 모델”(강준만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이다. 상대적으로 더 싫은 ‘최악’의 정당을 떨어뜨리기 위해 상대적으로 덜 싫은 ‘차악’의 정당을 찍는다. 정치권은 공약 개발보다 상대를 공격해 유권자의 반감이나 증오를 자극하는 데 매달린다. 증오 마케팅이 정치의 기본 동력이 되면서, 정치혐오의 악순환이 깊어진다.

이번 총선도 예외 없이 증오 마케팅이 기승을 부렸다. 지지자들을 규합하기 위한 막말·비방 경쟁이 도를 넘었다. 증오 마케팅과 짝을 이루는 ‘닥치고 지지’ 팬덤 정치는 끝을 몰랐다. 이는 특히 진보 여권에서 두드러졌다. 사실 이번 총선은 ‘비례 위성정당 창당’이란 꼼수로, 시작부터 심하게 망가졌다. 양당정치에 균열을 내려 도입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정치권 스스로 무력화시켰다. 처음부터 반대였던 야당이 꼼수를 찾아내자 여당이 덥석 물었다. 역대급 ‘대국민 우롱극’이다. 선거제도 개편 틈새에서 충분히 검증되지 못한 정당과 자격 미달 후보가 난립하고, 엉터리 공약이 쏟아졌다. “국민 화합을 위해 살인죄를 제외한 국민 모두의 전과 기록을 말소하자”(국민참여신당), “금융실명제와 노조, 교도소 폐지”(국가혁명배당금당) 등 공약은 웃자고 하는 얘긴가. 이런 정치 희화화가 없다.

코로나19 사태로 대충 묻어가는 깜깜이 선거란 탄식 속에 냉소와 불신이 고개를 든다. “투표해서 바뀐다면 선거는 사라질 것”이란 미국의 무정부주의자 엠마 골드만의 말이 떠오른다.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의 데이비드 런시먼은 “국민투표는 일견 민주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별로 그렇지 않다. 무대로 끌려 나온 관객은 자신들이 만들지도 않은 제안에 단순히 예스나 노를 말한다”고 회의한다. 이때 시민들은 선거 이벤트를 지켜보는 구경꾼에 머물며, 민주주의는 총 든 쿠데타 없이도 얼마든지 훼손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 국내 젊은 층 일각에서는 투표나 정당정치를 불신하고 ‘착한 소비’나 SNS 이슈 참여 같은 라이프스타일 중심의 개인화된 정치를 구현하는 ‘반(反)정치의 정치’ ‘정치 소비자 운동’ 경향이 발견된다. 선거 시즌에만 유권자 대접이고 투표로 별반 달라지지 않는 기성 정치제도 자체를 응징하는 식이다.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가 이들의 슬로건이다.

그러나 아무리 회의와 불신이 크고 냉소가 깊다 해도 당장 내 손에 주어진 투표권이란 소중한 무기, 권리를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칼럼니스트 홍세화의 말대로 “민주시민에게는 정치혐오와 냉소에 빠질 권리가 없다. 정치적 동물로서 우리는 분노를 적극적 참여로 표출해야 한다.”

내일 이맘때 쯤이면 많은 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석패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내가 지지한 후보가 이기지 못해도 선거 결과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내가 지지한 정당이 이겨도 상대가 잘못한 반사이익이 크다는 걸 놓치지 말아야 한다. 특히 내일 승자의 기쁨을 누릴 분들은 금배지의 영광이 ‘반감과 응징의 정치’에 기댄 절반의 승리일 수 있음을 뼈아프게 새기길 바란다.

가진 게 투표권밖에 없는 우리 유권자들은 그 유일한 힘을 행사하러 투표소에 간다. 때론 정치에 신물 나지만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으면서다. 계절은 꽃피는 봄, 21대 총선일 아침이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