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돈 풀어도 왜 푸는지는 따져봐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장정훈
장정훈 기자 중앙일보 팀장
장정훈 산업 2팀장

장정훈 산업 2팀장

약국 앞의 마스크 줄서기 혼란이 이번엔 소상공인 대출 창구 앞에서 재연되고 있다. 정부는 1일부터 코로나19로 막다른 길에 몰린 소상공인을 돕겠다며 신속 정책자금 대출을 시작했다. 이미 옷가게나 가구점, 금은방, 부동산, 꽃집 같은 골목길 소상공인은 월 매출이 80% 이상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대출을 받으려면 지역신용보증재단 보증서를 발급받는 데만 두 달 이상 걸렸고, 그 기간을 못 버텨 폐업이 속출했다. 그러니 대출 절차를 간소화해 도미노 파업을 막기 위해 긴급 자금을 풀겠다고 나선 거다.

하지만 이번에도 정부가 발표부터 한 데서 일이 꼬였다. 결과적으로 말만 앞세워 생색을 내려다보니 돈 풀기 효과는커녕 오히려 소상공인들 화만 돋우고 있다. 정부는 우선 대출 절차를 간소화했다지만 준비서류가 개인은 8종(이후 4종으로 축소), 법인은 15종에 달했다. 또 세금과 4대 보험 체납이 없어야 한다는 규정도 그대로여서 정작 세금 낼 돈도 없어 급전을 대출받으려던 사람들은 발길을 돌렸다. 더구나 신용등급 1~3등급은 시중은행, 4등급 이하는 기업은행과 소상공인진흥센터(소진공)로 대출 창구를 분산했는데, 양측의 신용등급 기준이 달라, 은행과 소진공을 뺑뺑이 도는 소상공인들이 많다.

노트북을 열며 4/8

노트북을 열며 4/8

특히 신용이 7등급 이하인 소상공인이 저리로 대출받을 수 있는 곳은 소진공이 유일하다. 하지만 소진공은 전국 62개 센터에 직원은 600여명뿐이다. 소진공 센터 한 곳당 하루 현장 접수 여력이 많아야 30명쯤인 셈이다. 그런데 수백명이 몰리니 번호표를 나눠주든, 마스크 같은 주민번호 홀짝제를 하든 제때 대출받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출현장의 혼란으로 생색냈던 정부가 욕만 먹게 되자, 정부는 어처구니 없게 책임을 소진공으로 돌렸다. 대체 밤늦게까지 서류 정리하고 새벽에 나와 번호표 나눠 준 소진공 센터 직원이 무슨 죄인가, 그렇다고 정부 말 믿고 밤새 줄섰다 허탕친 소상공인이 울화통을 터뜨렸다고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골목상권이 살아나겠는가.

전문가들은 신용등급이 낮은 소상공인도 소진공뿐 아니라 시중은행과 기업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한다. 6대 시중은행 점포만 지난해 상반기 기준 전국에 5300개가 있다. 그 전에 시중은행과 소진공의 신용등급 산정 기준을 손보는 게 선행돼야 할 것이다. 코로나19에 따른 비상 상황을 앞세워 정부든 정치권이든 너나없이 돈 풀기에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무슨 효과를 낼지 누구에게 어떻게 풀지부터 따져봐야지 않겠는가. 그게 다 세금인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장정훈 산업2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