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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에 재판 포기, SNS선 文 비판···옛날 그 판사들이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조주빈(25)이 지난달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나와 검찰 유치장으로 향하자 시민들이 조주빈의 강력처벌을 촉구하며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뉴스1]

조주빈(25)이 지난달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나와 검찰 유치장으로 향하자 시민들이 조주빈의 강력처벌을 촉구하며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뉴스1]

전국 법원의 인사와 조직 업무를 담당하는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달라진 판사들'과 '변화한 재판환경'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최근 n번방 사건 재배당을 요청한 오덕식(52) 부장판사가 그 대표적 사례다.

달라진 판사들에 속앓이하는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청와대 청원과 여론의 압박에 판사가 처음으로 재판을 포기한 이 사례를 안타까워했다. 오 부장판사가 먼저 재판을 포기할 것이라 예상치도 못했다. 한 행정처 관계자는 "국민의 공분은 이해하지만, 좋지 않은 선례로 남았다. 오 부장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앞선 성범죄 판결에서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며 오 판사를 교체하라는 청와대 청원 참여자가 40만명을 넘어선 시점에 이뤄진 결정이었다.

행정처가 속앓이를 하는 판사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SNS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던 현직 판사, 사표를 내고 총선에 출마한 전직 판사, 항소심이 진행 중인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무죄판결에 비판적 비평을 언론에 기고한 현직 판사의 사례도 고심이 되는 부분이다. 모두 전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2012년 판사들의 SNS사용 가이드라인 작업에 참여했던 한 전직 판사는 이를 두고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표현을 썼다. 이 전직 판사는 "판사를 둘러싼 환경도, 그 환경을 마주한 판사들도 모두 달라졌다. 판사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지던 룰을 모두 다시 써야하는 상황"이라 말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법조계의 경구가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대전여성단체 연합 회원들이 지난달 30일 대전지방검찰청 앞에서 텔레그램 N번방 이용자 강력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대전여성단체 연합 회원들이 지난달 30일 대전지방검찰청 앞에서 텔레그램 N번방 이용자 강력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규칙이 사라진 사례

서울남부지방법원의 김동진(51) 부장판사는 지난 2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재인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글을 썼다. 얼마 뒤 삭제했지만 언론 보도가 쏟아졌다. 지난 1월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검찰 인사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때도 대대적인 언론보도가 났다.

법관윤리강령에 따르면 법관은 교육이나 학술, 정확한 보도를 위한 경우를 제외하곤 구체적인 사건에 논평과 의견을 표명해선 안 된다. 김 부장판사는 이와 같은 이유로 2014년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당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1심 판결을 '지록위마 판결'이라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법원행정처는 김 부장판사에 대한 징계를 검토하지 않고 있다.

김동진 부장판사가 지난 1월 페이스북에 남긴 추미애 장관 비판 게시글. [김동진 판사 페이스북 캡처]

김동진 부장판사가 지난 1월 페이스북에 남긴 추미애 장관 비판 게시글. [김동진 판사 페이스북 캡처]

지난 2일 법률신문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된 신광렬·성창호·조의연 부장판사의 1심 무죄 판결을 비판하는 판례평석을 실은 최창석(52) 부장판사에 대한 갑론을박도 상당하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인 최 부장판사가 '정의'와 '국민 법감정'을 언급하며 1심 판결을 비판한 것도 논란이 됐다. 지방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양승태 대법원은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의 재판까지 개입하며 검찰 수사를 받았다면, 김명수 대법원은 최소한의 제재나 개입도 하지 않아 기준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 말했다.

환경이 변화한 사례 

판사들은 청와대 청원에 n번방 사건을 포기한 오덕식 판사를, 향후 판사들이 마주할 새로운 재판 환경의 상징적 사례라 본다. 정치권력을 넘어 SNS 등을 통한 여론의 압력이 재판에 훨씬 더 큰 압박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김병수(52)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는 최근 서울중앙지법 형사부 판사들에게 보낸 단체 이메일에서 "법원을 향한 비난의 화살을 오 부장판사가 혼자 감당하며 고통을 겪었다"고 썼다. 이어 "왜곡 과장된 보도로 인한 과도한 비난을 법관 개인이 책임지고 감당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도 했다.

오덕식 부장판사 교체를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 게시글. [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오덕식 부장판사 교체를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 게시글. [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판사들은 정치권력의 압력만 신경쓰면 됐지만 이젠 여론이란 더 큰 사회적 압박과 마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오덕식 부장의 사례는 법원이 마주할 새로운 여론을 보여준 것"이라며 "판결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이런 식의 판사 교체가 법조계에서 '판사 쇼핑' 현상을 초래하진 않을까 걱정"이라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을 하는 판사를 여론의 압박으로 교체하려는 시도가 늘지 않겠냐는 것이다.

새로운 규칙도 판사들이 써야

3~4년 전 법원을 떠난 판사들도 '격세지감'을 느낀다는 최근 법원의 모습을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를 겪은 김명수 대법원이 마주해야할 새로운 현실이란 것이다. 행정처의 힘이 빠진 상황에서 판사들의 여러 돌출 행동은 새로운 규칙을 찾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란 주장도 있다.

2012년 판사들의 첫 SNS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던 전직 판사는 "이젠 그때와는 다른 새로운 룰을 써야하는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그 당시에 대법원에선 판사의 SNS사용 자체를 금지하려 했다. 하지만 판사들이 스스로 규칙을 만들며 새로운 길을 열었다. 8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 시대와 환경 속에서 판사들이 다시 한번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것이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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