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람사전

한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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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람사전 3/25

사람사전 3/25

가족을 속이는 말. 친구를 속이는 말. 술집 주인을 속이는 말. 현실에는 없는 말. 실현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속고 속이는 말. 오늘 누군가가 그대에게 한잔 하자는 속임수를 쓰면 흔쾌히 속아주는 게 좋다. 속고 싶어도 속이는 사람이 없어, 내가 나를 속이며 홀로 한잔 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사전〉은 ‘한잔’의 뜻을 이렇게 풀었다. 물론 한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석 잔 되는 관성을 타박하려는 건 아니다. 외로움 이야기다. 늘 술잔에 술 3, 외로움 7을 섞어 마시는 우리 모두의 외로움 이야기다.

우리는 안다. 외로움을 술로 달래면 다음 날 아침 괴로움이 찾아온다는 것을. 그걸 알면서도 어둠이 깔리면 다시 술을 찾는다. 한 병. 두 병. 세 병. 알면서 왜 그럴까. 하나를 더 알기 때문이다. 외로움 견디는 것보다 괴로움 견디는 게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외로움을 주고 괴로움을 받는 정직한 거래가 술이라는 것을.

예전에 이런 카피를 썼다. 술맛의 10%는 술을 빚은 사람입니다. 나머지 90%는 마주 앉은 사람입니다. 많은 분들이 동의해줬다. 그래, 우린 알코올에 취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 취한다. 내 입에서 나오는 아무 말에 과장된 반응을 보여주는 내 앞에 앉은 사람에 취한다. 그는 내 외로움을 홀짝홀짝 다 받아 마시고 허허 웃는다. 그 맑은 표정에 취한다.

오늘 밤, 다시 사람에 취하고 싶다. 술잔과 술잔이 쨍 부딪치는 건배가 아니라, 가슴과 가슴이 쿵 부딪치는 건배를 하고 싶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내게 던져준 이 긴 외로움이 버겁다.

정철 카피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