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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무당 모신다" 여친 가족에게 7억 사기친 남친의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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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덕진구 만성동 전주지법 전경. 뉴스1

전북 전주시 덕진구 만성동 전주지법 전경. 뉴스1

"당신은 무당 기운이 있어."

전주지법, 사기 혐의 징역 4년 선고 #'광령할머니' 등 가상 캐릭터 내세워 #10년간 제사비·생활비 7억원 가로채 #경마 등 도박 비용 대려고 범행 #재판부 "피고인 이야기 모두 거짓말"

전북 완주에 사는 A씨(62)는 교제 중이던 여성 B씨에게 전화해 이같이 말했다. B씨는 덜컥 겁이 났다. A씨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사주팔자가 강해서 제사를 지내 이를 약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광령할머니'나 '선사'를 통해 제사를 지낼 테니 제사비를 달라"고 했다.

B씨는 연인 사이였던 A씨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A씨가 평소 "광령할머니는 용한 무당이고, 나는 광령할머니를 도우며 절에서 지내고 있다"고 말해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A씨가 돈을 요구하는 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B씨는 곧바로 50만원을 A씨 딸 계좌로 그에게 보냈다. 지난 2009년 12월 26일의 일이다.

A씨는 수시로 B씨에게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절에서 지내는 생활비와 제사비·축원비·선식비 용도였다. "집 살 돈이 필요하다"며 돈을 타내기도 했다. B씨는 2008년 6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237차례에 걸쳐 A씨에게 2억9700만원을 아낌없이 보냈다.

B씨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A씨는 2011년 4월 3일 전주 모처에서 B씨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B씨에게 한 것처럼 "사주팔자가 강해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역시 '광령할머니'와 '선사'를 내세웠다.

B씨 딸도 아버지 같은 A씨 말을 믿고 100만원을 송금했다. B씨 딸이 A씨에게 송금한 돈은 어머니보다 많았다. 지난해 3월까지 모두 179차례, 3억9700만원이었다. A씨는 10년 넘게 B씨 모녀에게 7억원을 받았다.

하지만 A씨가 B씨 모녀에게 한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었다. 본인이 '국보급 무당'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두 모녀를 감쪽같이 속였다. 사기 행각으로 손에 쥔 돈은 경마 등 도박 자금으로 쓴 것으로 드러났다.

11일 전주지법에 따르면 이 법원 형사2단독 오명희 부장판사는 사기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최근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검찰에 따르면 A씨가 언급한 '광령할머니'는 그와 수개월 알고 지냈을 뿐이고, '선사'는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법원은 A씨가 B씨 모녀에게 한 이야기를 모두 거짓말로 봤다. 처음부터 경마에 사용할 돈을 대기 위해 여러 상황을 꾸며 두 모녀를 속였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경마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연인 관계였던 여성과 그 딸의 피고인에 대한 신뢰와 건강, 경제적 상황 등에 대한 불안을 이용해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며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데다 동종 실형 전과가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죄책이 매우 무겁다"고 밝혔다. 다만 "범행을 인정하고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점, 교통사고로 건강이 좋지 않은 점 등을 참작해 형을 정했다"고 덧붙였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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