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진스키 전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냉전 종식」서방서 적극 나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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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금 미국·유럽에선 하나의「중대문제」를 놓고 의견들이 오가고 있다. 그것은 과연 냉전은 끝났는가?」하는 의문이다.
이 문제를 놓고 학자·정치가·저널리스트들은 치열한 논전을 벌이고 있다. 논전의 내용이야 어쨌든 냉전증식 문제를 놓고 입씨름을 벌이게됐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의 큰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성급하게 냉전은 끝났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이들은 소련에 대해 서방측은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냉전이란 동·서 양 진영의 이데올로기적 충돌이 아닌 상호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특징이 있다.
한편 이와 정반대 되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냉전을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인식, 호전적인 소련의 침략가능성을 강조한다.
이들은 또 냉전은 아직도 계속중이며, 서방측이 일방적으로 군축을 단행하는 행위는 일종의 투항주의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정책결정 자에 있어 이 같은 극단적 태도는 어느 쪽도 바람직하지 않다.
언제나 정세를 여러 각도에서 구조적으로 분석, 이를 토대로 정책이 세워져야한다.
오늘날 소련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와 체제 양쪽에서 실패를 드러내고 있다.
현재 소련이 처한 위기는 소련내부의 위기와 동유럽블록 전체의 위기로 나눌 수 있다. 내부위기는 경제개혁과 정치적 안정 사이의 모순관계다. 이 두 가지의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목표가 끊임없이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내부적 불안을 제거하고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숨돌릴 여유」를 필요로 하며 여기엔 서방측의 경제협력이 필수적이다.
동유럽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통제력은 최근 크게 쇠퇴하고 있다. 냉전의 상징이었던 동유럽이란 용어는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있으며 동유럽국가들은 옛날의「중 유럽」으로 되돌아가길 원한다.
동유럽국가들, 특히 헝가리와 폴란드의 개혁이 평화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파탄직전의 이들 나라 경제는 사회불안을 재촉, 순식간에 급격한 위기상황을 초래할지 모른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서방측이 해야할 일은 소련·동유럽의 정치·경제개혁을 지원하는 한편, 유럽의 지역안보수준을 높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냉전종식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정립해둘 필요가 있다.
서방측이 냉전종식을 단순한 동·서 양 진영간의 휴전 아닌 그 이상의 것으로 발전시키길 원한다면 냉전종식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세우고, 그 내용을 알려 국민들의 지지를 구해야 할 것이다.
또 서방측은 유럽에서 급변하는 동서관계의 안전보장을 위해 대처해야 한다.
소련은 만약 동유럽블록이 분열될 경우 나토가 그 틈을 타 영향력을 동유럽으로 확대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신 얄타체제, 즉 동유럽은 물론 유럽전체에서「새 질서」를 추구하는 듯한 인상을 소련에 주어 그들을 자극해선 안될 것이다.
지난 40년간 계속돼온 동서간 냉전구조는 정치·경제·군사·전략적으로 여러 문제들이 마치 그물처럼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자 철학적 문제는 이데올로기적 정통성의 강제에 대항하는「선택의 자유」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동구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탄압 문제에 대해 서방측은 강한 일체감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 베를린장벽·자유선거문제는 단순히 슬로건이 아니라 동서간 정치논쟁의 실체임을 인식해야한다.
그러면 냉전종식을 위해 서방측이 실제로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공산진영의 평화적 변혁을 촉진하기 위한 경제·기술원조 계획을 세워 이를 단계적·포괄적으로 시행하는 일이다.
그들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기술적 전문지식 차원 및 금융분야의 협력이다. 또 정치면에서 의회제도의 운영방법 등을 전수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시급한 것은 역시 차관문제일 것이다. 처음 중남미국가들을 대상으로 한「브래디 구상」같은 것을 동구에도 적용, 누적된 외채상환을 경감해주는 한편 새로 대규모 장기차관을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동과 서, 그리고 국제금융기관 3자로 구성되는 특별기구 설치가 필요하다.
한편 서방측으로부터 이 같은 원조를 받는 공산진영은 정치·경제적 다원주의의 제도화를 약속하는 등 서방측의 이니셔티브에 적극 호응하는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고려될 것은 유럽안전보장을 목표로 하는 바르샤바조약기구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동멩을 유럽의 영토적 현상유지를 목표로 한 순수한 의미의 지정학적 동맹으로 변경하는 일이다.
바르샤바조약기구만을 해체하거나 또는 바르샤바와 나토를 함께 해체하는 방법으로는 유럽의 동서화해·안전보장은 그 어느 것도 이룰 수 없다.
이들 2개의 동맹을 기초로 새로운 안전보장의 골격을 만들어야하며, 그 안에서 정치·경제적 개혁을 조정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인위적으로 설정된 동유럽블록을 해체하고 이 지역 국가들의 전통과 이상에 합치되는 국가형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헝가리가 사회민주주의국가, 폴란드가 기독교민주주의 체제로 되더라도 바르샤바조약 기구를 벗어나지 않으면 유럽의 세력균형은 유지될 수 있다.
한편 서방측은 빈 회담에서 소련 측에 재래식무기의 공정한 삭감,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공식적 포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서방측의 정치목표가 바르샤바기구의 붕괴에 있지 않음을 그들에게 보증해줘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유럽의 안정유지를 위한 양대 동맹의 역할▲특정 이데올로기를 동맹국에 강제하는데 동맹의 이용을 금지하는 새로운「동서간 공동성명」을 고려해봄직도 하다.
결론적으로 지금은 서방측이「고르바초프를 도와야 할까, 아닐까」의 근시안적 차원에서 벗어나 공산주의의 전반적 위기에 대해 서방측이 어떻게 대처할까를 놓고 생각할 때다. 비록 냉전구조가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해도 실제 그 종언은 단 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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