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의용군에 좌익은 소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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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중앙일보사가 대륙 연구소 및 대한상공 회의소와 공동으로 주관하는 「대륙연구」10월 두 번째 강좌가 지난 12일 대한상의 대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번 강좌에서는 조선 의용군의 일원으로 항일전쟁에 참가했던 연변동포 작가 김학철씨(74)가「나의 인생, 나의 조국」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다음은 강연 요지.
나는 서울서 보성 중학을 다니다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테러 활동에 참가하기 위해 임정을 찾아 상해로 갔다. 그러나 임정이 이미 남경으로 옮겨가고 없어 의열단의 후신 조선민족 혁명당에 가입했다. 김원봉 등 지도자의 뜻에 따라 중앙군교 (황포 군관학교)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8년 11월부터 45년 9월까지 조선 의용군은 중국 군과 함께 행동하면서 항일 전쟁을 수행했다.
조선 의용군은 백성들의 세금을 거둘 수 없는 입장이어서 국민당 군이나 중공당 팔노 군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공동작전을 수행했다.
국민당 군이나 팔노 군은 조선인을 중시하는 경향이었다. 이는 중국 군내에 일본어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 적어 조선인들이 포로신문·적진와해 선전 공작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39년까지는 국민당군도 항일 전쟁에 본격적이였으나 40년 이후엔 「군벌적」성격으로 인해 일본군과 대치 상황만 유지하는 현상 유지에 급급, 조선 의용군은 항일 투쟁에 적극적이던 팔노군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 뒤 태행산으로 들어가 조선 의용군과 팔노군 사령부는 본격적인 공동 작전을 수행했다.
조선 의용군은 태행산에 들어가기 전에 서안에서 광복군과 접촉했으나 통일 전선에 실패했다.
조선 의용군이 팔노군과 합류하면서 좌파적 성격을 띠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절대다수의 전사들은「민족주의적」성향을 띠고 있었다. 조선의용군·조선독립 동맹 내에 중국공산당원은 50여명 정도에 불과했다.
태행산 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나는 포로로 잡혀 일본 나가사키 감옥소에 이송되었으며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그 뒤 서울을 거쳐 월북했고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나는 중국의 문화 혁명 기간에 미발표 장편소설 『2O세기의 신화』로 인해 우파로 몰려 10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출감 후 65세의 나이로 투쟁의 우리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일념으로 『항전별곡』·『격정시대』 집필에 착수했다. 조선의용군·조선독립 동맹은 전투 시에는 공문서를 노새에 싣고 다니다 적군의 손에 많이 들어갔으며 짐작컨대 일본이나 혹은 일본 패전 뒤 미국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공식문서 분실로 망실된 항일 투쟁역사를 소설로 복원시키고자 소설에 뛰어든 것이다.
끝으로 조선 의용군에 소속되어 항일 전쟁을 수행하다가 전사한 우리 동료들의 「민족혼」이 분단으로 인한 냉전 이데올로기 아래서 우리 역사 속에 남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38년 10월∼45년 9월간의 전사자에 대해서만 이라도 이들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 살아남은 나의 절실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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