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호흡 콤비 “대장 목표가 메달이면 따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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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AFC U-23 챔피언십 우승으로 이끈 이상민(왼쪽)과 정태욱. 김상선 기자

한국을 AFC U-23 챔피언십 우승으로 이끈 이상민(왼쪽)과 정태욱. 김상선 기자

“마지막으로 같은 미용실에서 머리 깎고 깔끔하게 헤어져야죠.” (정태욱)

김학범호 우승 합작 중앙 수비수 #수비 불안으로 정태욱 늦게 합류 #주장 이상민 경기장 안팎 잔소리 #의식잃은 친구 살리며 우정 돈독

“한 달 가까이 붙어있었는데, 당분간 연락 안 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상민)

28일 인천공항에서 만난 한국 올림픽 축구대표팀의 동갑내기 중앙 수비수 정태욱(23·대구FC)과 이상민(23·울산 현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장난기 넘치는 여느 20대처럼 티격태격했다. 며칠 전까지도 우승 트로피와 2020년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위해 전투 같은 경기를 펼쳤던 선수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김학범(60)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팀은 27일 끝난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겸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U-23)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1-0으로 꺾고 우승했다. AFC U-23 챔피언십은 2014년 창설됐는데, 한국은 첫 우승이다. 한국은 1~3위에 주어지는 올림픽 본선 티켓도 확보했다. 이상민은 “하루가 지났지만,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는다. 한국을 대표해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처음 우승했다.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며 기뻐했다. 정태욱은 “그냥 우승도 어려운데, 가장 친한 친구와 우승을 합작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다”며 웃었다.

정태욱이 결승전 골을 넣고 이상민의 축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정태욱이 결승전 골을 넣고 이상민의 축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정태욱과 이상민은 이번 대회 우승 주역이다. 개막 전까지도 김학범호의 최대 과제는 수비 불안이었다. 두 선수가 이 고민을 말끔히 해결했다. 정태욱은 지난해 10월 올림픽팀에 합류해 기존 멤버였던 이상민과 짝을 이뤘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정태욱은 당초 올림픽팀 소집 대상에서 제외됐다. 수비 불안 해결을 위해 김 감독이 불렀다. 한국은 이번 대회 6경기에서 3실점 했다. 정태욱과 이상민은 4경기에서 중앙수비수로 호흡을 맞췄고, 2실점 했다. 이상민은 “태욱이는 가장 친한 친구다. 2015년 18세 이하(U-18) 대표팀에서 처음 만났다. 포지션도 같아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다. 덕분에 실제로 내 경기력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두 선수는 수비 외에도 팀에 크게 기여했다. 정태욱은 결승전 연장 후반 8분 천금 같은 헤딩 결승골을 넣었다. 가장 먼저 달려와 축하한 선수도 이상민이다. 이상민은 “평소에는 골을 넣어도 서로 잘 안 뛰어간다. 특히 체력이 바닥난 연장전에서는 축하한다고 달려갈 엄두도 못 낸다. 하지만 친구 태욱이가 골을 넣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고 말했다. 듣고 있던 정태욱은 겸연쩍다는 듯 “그토록 기다리던 골인데, 상민이가 너무 일찍 달려와 등에 업히는 바람에 생각했던 세리머니도 못했다. 원래 여유 있는 포즈로 멋진 표정을 지으려 했다”고 타박했다. 이상민은 “좋은 얘기 해줘도 이러냐. 괜히 업혔다가 축하하러 온 동료들에게 같이 밟힌 나도 억울하다”며 발끈했다.

정태욱이 결정적인 한순간 빛났다면, 이상민은 주장으로서 그라운드 안팎을 누볐다. 그런 그에게 한 차례 위기가 있었다. 대회 초반 기대만큼 좋은 경기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자신은 물론 동료까지 살펴야 하는 그로선 고민이었다. 그런 이상민에게 정태욱은 듬직한 조력자였다. 정태욱은 이상민 뒤에서 묵묵히 팀 분위기를 띄웠다. 가장 큰 소리로 ‘화이팅’을 외쳤다. 이상민은 “대회 전까지도 태욱이 가장 깐족거려서 내심 서운했는데, 가장 힘들 때 든든한 파트너가 돼줬다”고 털어놨다. 정태욱은 “주장은 감독님과 동급이다. 우리 주장 기가 살아야 팀 전체 사기가 올라간다는 생각으로 상민이를 지원했다. 위기를 원팀으로 잘 넘겨 우승했다”고 말했다. 이상민의 경기력이 돌아온 시점을 묻자 정태욱은 “어느 순간부터 시어머니 잔소리가 들렸는데, 그때였다. 상민이 잔소리를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며 흘겨봤다. 이상민은 “태욱이 작은 엄마라는 생각으로 뭐든 끝까지 간섭할 것”이라고 받아쳤다.

심폐소생술 하는 이상민. [뉴시스]

심폐소생술 하는 이상민. [뉴시스]

정태욱과 이상민이 이처럼 끈끈한 사이가 된 건 ‘인공호흡 사건’ 때부터다. 2017년 3월 잠비아 평가전 때 정태욱이 상대 선수와 부딪혀 의식을 잃었다. 이상민이 곧장 달려와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이후 둘은 ‘인공호흡 듀오’로 불린다. 정태욱은 “이번 대회 직전 고열에 시달렸는데, 유일하게 방을 찾아와 상태를 살펴준 게 상민이다. 문자메시지는 매일 주고받는다. 우리 사이엔 비밀이 없다”고 자랑했다. 이상민은 “작대기(장신 정태욱의 별명)가 요즘 나를 대하는 태도가 소홀해졌다.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며 핀잔했다.

두 사람은 이제 올림픽 메달을 바라본다. 정태욱은 “상민이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태극마크를 달고 나란히 올림픽 무대를 누비는 꿈을 이야기했다. 그 꿈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이상민은 “대장님(김학범 감독)이 동메달 이상 목표로 삼으셨다면, 나와 태욱이 목표도 따라간다. 올여름을 하얗게 불태우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인천=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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