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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칼럼

천 한 조각에 담긴 남북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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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월드컵 축구대회에 당하고, 북한 미사일에 된통 얻어 맞고, 물난리에 휩쓸리고…. 정말 지지리 운도 없는 전시회다. 6월 13일 시작해 8월 16일까지 계속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기획전시 '평양에서 온 국보들-북녘의 문화유산' 이야기다. 하필이면 월드컵 개막 직후 행사를 오픈했으니 전시기획자가 엔간히도 아둔했다고 탓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북한과 함께 벌이는 사업이란 게 매양 이렇다는 걸 겪어 본 사람은 안다.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도 하루 이틀 전 뚜렷한 이유도 대지 않은 채 "이번엔 안되갔습네다"라고 통보하기 일쑤니까.

온갖 악재에 치인 탓에 관람 실적은 말씀이 아니었다. 전시 첫날 유료 관객은 겨우 224명. 주말에도 700~900명에 불과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용산 국립박물관이 마련한 전시회라는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7월 들어 관람객이 늘기 시작해 그나마 다행이다.

전시회의 백미는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상(사진)이다. 1992년 개성시 해선리에 있는 현릉(왕건의 능)에서 발굴되었다. 특이하게도 벌거벗은 동상이다. 북한에서는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던 문화재다. 그래서 북측 관계자들도 보물을 건네주길 망설였다고 한다.

청동상을 남쪽에 반입하는 과정에서 작은 승강이가 벌어졌다. 나체 그대로 전시할지, 옷을 입힐지를 두고서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조현종 고고부장은 "예술품이니 그대로 전시하자고 했더니 북측에서 반대하더라"고 말했다. 남측이 다시 "전문가에게 의뢰해 좋은 비단옷을 만들어 입혀 전시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북측은 이것도 반대했다. 자기네 유물에 남한이 만든 옷을 입히는 것을 꺼리는 듯했다.

북한은 최초의 통일국가를 통일신라가 아닌 고려라고 본다. 고려 태조의 청동상은 그래서 단순한 예술품이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천으로 특정 부위를 가리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7만5000원에 산 옥색 비단천으로 청동상의 무릎께를 덮고 전시를 시작했다. 왕건에게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천 안쪽 동상의 '고추'는 길이 2㎝로 매우 작다. 가로로 주름까지 새겨져 꼭 번데기 같다. 색욕을 멀리하는 불교 이념에 따른 '마음장상(馬陰藏相)'을 구현한 것이라고 한다.

북한은 왜 귀중한 문화재 90점을 남한에 빌려주기로 했을까. 전문가들은 "진열장이나 전시보조물부터 연대측정 장비까지 아쉬운 게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북측 전문가가 '당신들은 새로 지은 좋은 박물관에 유물을 보관하면서 우리 것은 그냥 놔두면 되겠느냐. 다 같은 문화재인데'라더라"고 했다. 북한은 유물을 아직도 판유리 진열장에 보관한다. 우리는 이미 30년 전에 안전유리로 바꾸었다. 필자도 2년 전 평양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을 방문했다가 박물관 1층의 화장실이 물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혀를 찬 적이 있다.

미사일 발사 이후 북한을 보는 남한 국민의 눈길은 완전히 싸늘해졌다. 정부가 잘될 것이라고 우겨도 아무도 믿지 않는 분위기다. 전시회가 문전성시를 이루지 못한 데는 북한에 대해 질려 버린 민심도 한몫했을 것이다. 정병국.우상호.손봉숙 의원이 추진 중인 '남북문화재 교류.지원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도 냉기류에 휩쓸려 주춤하고 있다.

가끔 "사우나를 하나"는 농담을 들어가며 전시장에 앉아 있는 왕건은 지금의 남북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천 한 조각에 담긴 남북 간 시각 차이, 대결하면서도 대화해야 하는 남북 관계의 이중성, 북한 문화재 전문가들의 간절한 기대를 그도 느끼고 있을까.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무리 어려워도 문화 교류는 계속돼야 한다"고 외쳐 주었으면 좋겠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