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감도’는 조감도와 무슨 관계일까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669호 18면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27〉

할리우드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펜타곤 모습. 날아가는 새의 시각으로 내려다 보는 ‘버드 아이 뷰 숏’이다. 비싼 비행기를 빌려야 촬영할 수 있었던 이 같은 장면은 이제 아주 흔하다. 드론 때문이다. [중앙포토]

할리우드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펜타곤 모습. 날아가는 새의 시각으로 내려다 보는 ‘버드 아이 뷰 숏’이다. 비싼 비행기를 빌려야 촬영할 수 있었던 이 같은 장면은 이제 아주 흔하다. 드론 때문이다. [중앙포토]

할리우드 영화에 빠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도시 전체를 하늘에서 촬영한 장면이다. 이른바 ‘버드 아이 뷰 숏(bird’s eye view shot)’이다. 관객들은 이 ‘전지적 시점’을 통해 세부적 드라마 진행에 몰입되지 않고 전체 맥락을 수시로 확인한다. 이야기의 진행을 예상한다는 이야기다. 영화 감독은 그렇게 예상된 진행을 비틀고 건너뛰며 ‘재미’를 창조한다.

위에서 내려보는 다른 시각으로 #자기중심적 사고 벗어날 수 있어 #이상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엔 #바우하우스로부터의 영향이 솔솔

비싼 헬기를 전세내야 촬영이 가능했던 ‘버드 아이 뷰 숏’이 이제 흔하다. 유튜브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드론 때문이다. 그러나 비행기나 드론이 없던 시절에도 화가들은 수시로 ‘버드 아이 뷰 숏’으로 그림을 그렸다. ‘조감도(鳥瞰圖)’다. ‘버드 아이 뷰 숏’은 ‘조감도’에서 온 개념이다(조감도와는 반대로 밑에서 올려다보는 도법은 ‘개구리원근법’이라 한다).

조감도는 오래된 회화양식이다. 서양화에 비해 동양화에서는 아주 흔하다. 부감도(俯瞰圖), 하감도(下瞰圖)로 불렸다. 예를 들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살펴보자. 화면의 시점은 오른쪽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형적인 ‘조감도’ 방식을 취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두막 입구의 둥근 문이다. 문의 내부를 저렇게 그리려면 왼쪽 아래에서 비스듬히 올려다봐야 한다. 조감도와는 정반대 방향인 개구리원근법이다. 한 화면에 두 개 이상의 관점이 존재하는 ‘멀티플 퍼스펙티브(multiple perspective)’다. 인상파 화가들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든 화면의 대상들이 환원되는 ‘싱글 퍼스펙티브(single perspective)’를 폐기하고 새롭게 구현하고자 했던 대안이 추사의 ‘조감도’에 이미 들어있었다.

하지만 서구의 화가들은 새로운 기계산업과 대안적 회화를 연계해 ‘건축’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갔다. ‘편집의 차원’을 창조적으로 바꿨다는 거다. 말레비치, 몬드리안을 거쳐 ‘바우하우스’로 이어지는 바로 그 과정이다. 그럼, 추사 김정희의 후예들은 어땠을까? ‘그냥’ 쭉 있었다.

원근법 벗어난 우키요에, 유럽 화단 습격

건축학도이자 시인이었던 김해경은 자신의 예명 ‘이상’에 상자(箱)라는 뜻을 담았다. 그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는 바우하우스와 르 꼬르비지에의 ‘육면각체 건축’과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중앙포토],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건축학도이자 시인이었던 김해경은 자신의 예명 ‘이상’에 상자(箱)라는 뜻을 담았다. 그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는 바우하우스와 르 꼬르비지에의 ‘육면각체 건축’과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중앙포토],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비행기가 없던 시절,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조감도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심리학의 오래된 주제다. 피아제는 인지발달을 ‘조감도’와 같은 공간지각능력과 관련지어 설명한다. 자신의 신체가 가지는 물리적 위치를 상대화시키는 능력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조망수용(perspective taking)’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거다. 자신의 관점을 상대화할 수 있어야 조감도와 같은 ‘추상적 관점’이 가능해진다.

서구 회화에서 ‘조감도’가 본격 도입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물론 중세 시대 그림에도 조감도는 존재했다. 그러나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1377~1446)가 원근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 이후, 소실점을 한 곳으로 고정한 원근법적 그림이 서양 회화의 표준이 되었다. 그림은 대부분 인간의 눈과 소실점을 잇는 높이로 그려졌다.

인상파 이후의 화가들은 앞 다투어 원근법적 회화를 해체했다. 원근법의 폐기는 대상재현의 포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絵)’는 유럽의 화가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1862년 런던 만국박람회와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일본 문화가 유럽에 본격 소개됐다. 모네, 마네, 고흐를 비롯한 거의 모든 인상주의 화가들은 일본 회화에 미친 듯이 빠져들었다. 이른바 ‘자포니즘(Japonism)’이다. 선명한 색채, 밝은 화면, 과장된 명암대비, 뚜렷한 윤곽선의 유키요에는 원근법적 재현과는 상관없는 전혀 다른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키요에 속의 인물과 대상들은 화면 중심에 있지 않았다. 마치 사진처럼 화면의 사각형 틀에 의해 대상의 일부가 잘려나간 그림도 있었다. 대상은 화폭의 한 가운데 완성된 형태로 있어야 한다는 당시 서구화가들의 통념이 완전히 부서지는 경험이었다. 게다가 일본 회화 특유의 ‘조감도’는 그들이 그토록 해체하고 싶었던 원근법적 회화의 대안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주었다.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환원되는 원근법의 해체와 ‘자포니즘’이라는 타자의 발견, 그리고 추상회화로의 전개는 피아제식 ‘조망수용’, 즉 자기중심적 사고의 해체와 추상적 사고의 형성이라는 심리학적 설명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조감도를 일본에서는 ‘후키누키야다이(吹拔屋臺)’, 즉 ‘하늘에서 지붕을 뚫고 내려다보는 투시법’이라고 한다. 주로 에마키모노(繪卷物), 혹은 에마키(繪卷)라고 불리는 일본식 전통 두루마리 형태의 그림 이야기에 사용됐다. 천장과 벽, 그 이외의 물건은 과감하게 제거하고 오른쪽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장면이 계속 이어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는 구름으로 경계를 짓는다.

오늘날 신문 사이에 ‘찌라시’로 투입되는 아파트 투시도 광고는 이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조감도와 ‘아파트 찌라시 광고’, 이 둘의 관계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뜬금없지만 이상(李箱)의 오감도(烏瞰圖)를 거쳐야 한다.

이상의 ‘오감도’는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총 15편의 연작시의 첫 번째 시다.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로 시작해서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와 같은 문장이 지루하게 반복되더니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로 허망하게 끝나는 이 시는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그러나 누구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시다. 이 ‘아해’들은 누구고, 도대체 뭐가 무서운 것일까? 그리고 왜 13명일까?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내게는 제목이 유난히 흥미로웠다. ‘조감도’가 아니고 왜 ‘오감도’일까. 이상은 왜 새 ‘조(鳥)’가 아니고 까마귀 ‘오(烏)’를 썼을까.  ‘조감도’를 잘못 표기한 오자(誤字)라는 해석도 많았다. 실제로 ‘鳥’와 ‘烏’는 사뭇 비슷하다. 그러나 전체 맥락을 고려하면 ‘오감도’는 온전히 이상이 만들어낸 신조어라고 보는 게 옳다. 그렇다면 새가 독수리도 있고, 참새도 있고, 갈매기도 있는데, 왜 하필 ‘까마귀’였을까.

이상에 관한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는 김미영은 2010년에 발표한 ‘李箱의〈烏瞰圖: 詩第一號〉와 〈建築無限六面角體 : 且8氏의 出發〉의 새로운 해석: 조형예술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이 ‘오감도’의 까마귀가 프랑스의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를 지칭하거나 적어도 그의 이름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르 꼬르뷔지에와 ‘까마귀’의 연관은 다음 호에 설명하겠다.) 이상이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온 후 총독부의 건축기수로 일했고, 당시 유럽 모더니즘 흐름에 관한 아주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가능한 추론이다.

김미영은 한발 더 나가 ‘13인의 아해’는 바우하우스의 ‘13인의 마이스터’일 수도 있다고 슬쩍 밀어 넣는다. 너무 나간다 싶다. 그런데 본명이 김해경인 이상의 이름에 ‘상(箱)’은 ‘상자(箱子)’를 뜻하고, 이를 그의 또 다른 시 ‘건축무한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와 연결시켜 생각하면 느닷없는 바우하우스의 등장이 사뭇 흥미롭다. 말레비치, 몬드리안의 사각형이 바우하우스와 르 꼬르뷔지에의 ‘육면각체 건축’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13인의 아해’는 바우하우스의 13장인일까

게다가 이상은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부제로 ‘AU MAGASIN DE NOUVEAUTES’라는 불어도(!) 쓰고 있다. ‘새로운 것들이 있는 상점에서’라는 뜻이다. 대표적 근대 건축물이라할 수 있는 각진 모양의 백화점을 의미한다. 이상의 무한육면각체와 아파트 건축의 아버지 르 꼬르뷔지에, 까마귀, 조감도, 그리고 아파트 찌라시 광고로 이어지는 이 난삽한 퍼즐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이 퍼즐의 핵심에 2차원의 평면을 고집하는 몬드리안을 밀어내고 리시츠키와 같은 러시아 구축주의자와 손잡으며 회화의 3차원적 가능성을 모색하던 두스부르흐가 있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베를린 자유대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디플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 자유대 전임강사, 명지대 교수를 역임했다. 2012년 교수를 사임하고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에서 일본화를 전공했다. 2016년 귀국 후 여수에 살며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작은 배를 타고나가 눈먼 고기도 잡는다. 저서로 『에디톨로지』『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남자의 물건』 등이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