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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테크놀로지의 기원은 ‘네모난 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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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호 26면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23>

‘DT(data technology)의 시대’라고 이야기한 인터뷰를 읽었다. 인터넷에서 모바일로, 모바일에서 데이터 기술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4차 산업혁명’ 같은 뜬금없는 개념보다는 훨씬 통찰력 있다.

효율적인 지식관리 체계로 정착 #‘분절화와 통합’이 사고체계 바꿔 #“기계 생산과 화해해야 예술 부활” #바우하우스 지향점에 논란 점화

그러나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진정한 데이터 기술은 ‘네모난 책’이 나왔을 때 이미 시작됐다. 무지하게 오래되었다는 이야기다. 네모난 책, 즉 종이가 네모나게 접혀 제본된 책이 나오면서 인간은 ‘지식’과 ‘정보’를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됐다. 책의 원시적 형태인 파피루스는 둘둘 말아야 한다. ‘두루마리 지식’은 몹시 불편하다. 내용을 확인하려면 처음부터 다 펼쳐야 한다.

네모난 책’은 데이터 관리의 원천기술이다. 네모난 종이를 실로 꿰맨 책에는 페이지·목차·색인이 포함된다. 책장에 세워 정리할 수도 있다.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네모난 책’은 데이터 관리의 원천기술이다. 네모난 종이를 실로 꿰맨 책에는 페이지·목차·색인이 포함된다. 책장에 세워 정리할 수도 있다.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인류가 양피지를 펴서 가운데를 실로 꿰매고 접는 ‘코덱스(codex)’라는 형식의 책을 만들어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4세기께의 일이다. 코덱스가 나타난 이유는 원하는 내용을 빨리 찾기 위해서다. 지식이 축적되고 광범위해지면서, 개인의 기억에 기초한 지식전승이 더는 불가능해졌다. 보다 효율적인 지식관리 체계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코덱스가 발명된 것이다.

우선 접힌 면에 페이지 숫자를 적어 넣었다. 지식의 분절화·파편화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동시에 이 분절된 지식을 통합해 한눈에 파악하기 위해 목차를 만들고 색인(index)을 넣었다. 이제 내가 원하는 지식의 내용을 확인하기가 아주 간단해졌다. 뿐만 아니라 다른 책과 비교하면서 내 생각을 ‘편집’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게다가 세워서 가지런하게 보관할 수 있어, 책장을 통한 분류 자체가 하나의 데이터 기술이 되었다. ‘분절화’와 ‘통합’이라는 데이터 편집의 기본 기술은 이렇게 ‘네모난 책’이 나오면서 생겨났다. 데이터 테크놀로지의 바탕이 되는 ‘디지털(digital)’의 원리는 ‘두루마리 책’에서 ‘네모난 책’으로의 전환과 동일하다. 연속된 아날로그 정보를 띄엄띄엄 떨어진 숫자로 바꾼 것이 디지털이다. 라틴어로 손가락을 뜻하는 ‘디지투스(digitus)’에서 유래한 ‘디지털’은 서로 연결되지 않고 끊겨있는 0과 1 같은 숫자로 정보를 기록해 관리한다.

정보가 분절화되면 관리가 훨씬 편리하고 정확하다. 게다가 편집이 가능하다. 메타 데이터로 무한히 확대된다. ‘네모난 책’을 통해 분절화된 정보가 인간의 사고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꿨던 것처럼, 디지털화된 데이터 테크놀로지 또한 지식의 구성과 편집 방식의 획기적 전환을 가져오고 있다.

그로피우스, ‘기술과 예술의 통합’ 지향

‘건축의 우산 아래 모든 예술은 통합되어야 한다’는 그로피우스의 신념을 형상화한 파이닝거의 판화.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건축의 우산 아래 모든 예술은 통합되어야 한다’는 그로피우스의 신념을 형상화한 파이닝거의 판화.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독일의 사회철학자 하버마스는 지식의 단편화·분절화의 과정을 ‘모더니티’의 특징으로 설명한다. 계몽주의에서 시작된 인간의 합리성, 이성중심주의적 모더니티에 대한 비관과 허무주의로 일관한 아도르노와는 달리 하버마스는 모더니티를 아직 ‘미완의 프로젝트’로 파악한다. 지식의 분절화·파편화를 통한 전문화의 과정이 일어났지만, 이 분절화된 지식을 종합하는 과정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근대에 들어서며 종교적 도그마에 함몰된 지식이 정치·경제·문학·도덕 같은 영역으로 세분화되고 분절화되는 과정은 자율적 지식의 출현으로 봐야한다. 발전이며 진보라는 것이다.

이처럼 자율화되고 단편화된 근대의 지식을 통합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발현에서 찾고 있다. 통합적·종합적 지식은 ‘소통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에디톨로지 용어로는 ‘편집가능성(editability)’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우하우스의 그로피우스도 인간 역사를 발전과 진보의 역사로 파악했다. 근대 예술의 분화과정에는 과학기술, 기계산업으로 인한 변화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필요한 것은 건축의 우산 아래 이제까지 파편화된 예술활동을 통합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때의 ‘건축’이란 실제로 건물을 세우는 작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생산활동을 포괄하는 총제적 개념을 지칭하는 상징적 개념이다(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에 ‘건축공방’을 별도로 만들지 않았던 이유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바우하우스가 근대 미학운동의 ‘깔때기’로 설명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피우스가 1919년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에서 야심차게 선언했던 통합적 ‘종합예술로서의 건축’은 시작부터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렸다. 우선 바우하우스 출범 당시 기꺼이 통합에 동의했던 구 바이마르 미술대학 교수와 학생들은 수공예 공방에 중점을 둔 바우하우스의 교과과정에 반발했다. 전통적 미술 아카데미를 고수하려는 이들과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로 초빙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사이의 알력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결국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1921년 4월, 구 미술대학 구성원들은 바우하우스와 갈라서기로 결정했다. 마음은 갈라섰지만 정작 떠날 곳이 없었던 그들은 바우하우스 본관에 자리 잡았다. 구태여 소유권을 따지자면, 본관 건물은 바우하우스가 들어서기 전 구 미술학교의 소유였다. 결국 바우하우스와 미술대학은 같은 건물에 벽 하나를 두고 별도의 학교로 운영됐다. 이렇게 재설립된 바이마르 국립미술대학은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를 떠나던 1925년까지 같은 건물에서 운영됐다.

재정적 어려움은 말도 못했다. 튀링겐 주의회에서 지원하기로 한 보조금은 개교 후 1년이 지나서야 겨우 지급됐다. 그러나 정작 그 돈을 받았을 때는 엄청난 전후 인플레이션으로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다. 400마르크 하던 동판프레스는 일 년 후에는 3만 5000마르크가 넘었다. 거의 모든 학교운영 경비를 그로피우스 혼자 책임져야 했다. 그는 지지자들을 찾아다니며 기금을 모았다.

학교의 실제상황은 심각했다. 1919년 겨울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교실에는 난방장치는 물론 책상과 의자도 없었다. 학생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수업을 받았다. 수업을 제대로 하기 힘든 상황이 계속되자, 일주일에 한 번만 했다. 학생들은 과제만 잔뜩 받아들고 집에서 각자 공부해야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경제적 상황 또한 형편없었다. 숙소를 구하지 못한 학생들도 많았다. 그로피우스는 요리나 세탁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교실에서 숙박하는 것을 허용했다. 일부 학생들은 스스로 경작해서 학교식당에서 요리를 해 먹었을 정도다.

제대로 입을 옷도 없었다. 낡은 군복이나 챙기면 다행이었다. 거지꼴을 하고 시내를 오가며, 주말이면 축제라며 춤과 노래로 시끄러운 바우하우스를 보수적인 바이마르 시민들이 곱게 볼 리 없었다. 1919년 12월 12일, 바이마르 시민들은 바우하우스를 비난하는 집회를 열었다. 바우하우스가 유태인을 비롯한 외국인을 주로 학생으로 받아들이며 반독일적 미술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우하우스 학생이었던 한스 그로스도 이 집회에 참석해 그로피우스를 비난했다(그는 후에 자발적인 나치협력자가 된다. 하지만 전쟁 후 미국으로 건너가 나치의 피해자로 둔갑한다). 이 안티 바우하우스 집회사건으로 인해 그로스를 비롯한 14명의 학생이 퇴학당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 초기 가장 심각했던 위기는 이텐과 그로피우스의 갈등이었다.

공개 비난받은 이텐, 결국 학교 떠나

바우하우스 교장 시절의 그로피우스.

바우하우스 교장 시절의 그로피우스.

이텐은 애초부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미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공방 중심의 생산활동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기술과 예술의 통합이라는 그로피우스의 근대적 이상에는 더 더욱 동의할 수 없었다. 창조력을 키워내는 예술교육에서 개인의 개성을 극대화하려면 지식의 단편화, 분절화는 불가피하다. 이텐의 관심은 여기까지였다. 그로피우스가 생각한 기계생산까지를 통합하는 종합적 예술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로피우스에 대한 이텐의 은근한 도전은 바우하우스 설립 초기에는 용납됐다. 선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이텐은 기초과정은 물론 공방의 일부까지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텐은 점점 노골적으로 외부세계와는 무관한 ‘독립적 예술’과 ‘기계생산과의 제휴’ 사이에 하나를 결정할 것을 그로피우스를 비롯한 바우하우스 선생들에게 요구했다.

1922년이 시작되면서 그로피우스는 각 공방을 담당하는 마이스터들을 초빙해 확정했다. 그리고 그해 3월 그로피우스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물론 마이스터들 사이에서도 자신을 능가하는 리더십을 얻어가던 이텐의 주장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문서를 마이이터들에게 돌렸다(파이닝거와 클레 조차도 기계생산을 포함시키려는 그로피우스의 생각에 반대했다).  장문의 회람장에서 그로피우스는 “이텐의 예술교육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구시대적 이념에 불과하며, 새로운 시대에는 적응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과거 민중의 생활과 유리되었던 예술을 다시 세우려면, 시대적 현상이 되어버린 기계생산과 화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텐의 주장처럼 실용적 작업과 괴리된 예술은 ‘낭만주의의 섬’에 갇혀 버릴 것이다…모든 분야에서 분석적 노동에서 종합적 노동으로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진정한 예술은 기계의 반대자가 아니다. 기계에 붙어있는 마귀를 쫓아낼 뿐이다.”

모더니티에 대한 비관적 견해를 유지하며, 고립된 예술가의 길을 고집했던 이텐은 결국 1923년 바우하우스를 떠났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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