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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만들었다, 그러므로 나도 만들 수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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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호 18면

바우하우스 이야기 〈29〉

이제는 그저 조금 아쉽다는 느낌뿐이지만, 한 때는 정말 한 맺힌 심정이었다. 십여 년 넘게 독일서 공부해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지만, 한국의 심리학과에 취직할 수는 없었다. 내가 전공한 ‘문화심리학’이 심리학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20세기 초 유럽의 ‘구성주의’ 열풍 #미술과 건축서 가장 활발하게 진행 #데 스틸 그룹 이끌던 두스부르흐 #바우하우스 근처서 사설 건축 강의

도대체 왜 심리학이 아니냐고 물었다. 심리학 교과서에 없다는 거다. 한국 심리학계는 미국에서 학위 받은 이들이 주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미국 심리학 교과서를 경전처럼 떠받들었다. 바로 그 미국심리학 교과서에 ‘문화심리학’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난 심리학과 교수가 아닌 교양학부 교수, 혹은 대학원 교수를 전전했다. 십여 년을 버티며 테뉴어까지 받았으나 결국 때려치웠다. 어차피 남을 가르치는 일은 내 체질이 아니었다.

미국의 심리학 교과서는 미국의 심리학자들이 만든 거다. 한국의 심리학 교과서가 미국의 심리학 교과서와 똑같을 필요는 없다. 같아서도 안 된다. 미국 학자들이 만든 심리학 이론을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한, 한국 심리학자들은 그 이론에 맞는 데이터만 제공하는 ‘SCSI 논문’만 양산할 뿐이다. 미국 학자들에 의해 ‘구성된’ 심리학 이론에 대한 비판적 해체의 작업이 없다면, ‘지식의 종속’은 쭉 계속된다.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창조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1920년대 등장한 ‘창조성’과 ‘구성주의’

헤르베르트 바이어가 1923년에 그린 바우하우스 교장실의 아이소메트릭 투시도. [사진 윤광준]

헤르베르트 바이어가 1923년에 그린 바우하우스 교장실의 아이소메트릭 투시도. [사진 윤광준]

인간이 스스로 창조적이 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인식의 대상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깨닫게 되면서부터다. 이른바 ‘구성주의’의 출현이다. ‘구글 엔그램뷰어’에서 사용빈도를 검색해보면 ‘창조성’과 ‘구성주의’의 단어 사용빈도 그래프는 시기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두 단어 모두 1920년대에 나타나서 급격한 속도로 증가했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상이 ‘구성되었다’, 즉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야 ‘나도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구성주의’는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이분법을 뛰어넘는다. 실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구성주의’는 어느 한 분야의 학파나 흐름이 아니다. 20세기 초반 심리학, 철학, 사회학, 건축, 미술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한 지식혁명을 이야기한다.

재현된 바우하우스 교장실 모습. [사진 윤광준]

재현된 바우하우스 교장실 모습. [사진 윤광준]

다른 영역들에 비해 미술과 건축에서 나타나는 구성주의가 가장 극적이고 현실적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 아주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지난번 연재에서의 다룬 ‘아파트’라는 근대적 주거방식은 네덜란드의 데 스틸이나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에서 엘 리시츠키, 타틀린 등의 러시아 ‘구축주의’ 그리고 바우하우스로 넘어가는 근대 ‘구성주의’의 진화과정을 통해 설명 가능하다.

몬드리안과 두스부르흐가 주축이 된 데 스틸 그룹은 대상을 더 이상 환원 불가능한 사각형으로 ‘요소화(elementarization)’하고 이를 화면상에 전경과 배경이 해체된 상태로 다시 ‘통합(integration)’하려는 구성주의적 작업원칙에 합의한다. 그 후 건축가, 조각가 등의 다양한 예술가들이 데 스틸 그룹에 합류하지만, 몬드리안은 끝까지 2차원의 화면에서의 구성주의를 고집한다.

그러나 두스부르흐는 데 스틸의 영역을 2차원 화면에서 벗어나 가구, 건축, 영화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시각예술 영역으로 확장하고 싶어했다. 3차원 공간의 구성은 물론 시간의 흐름까지도 포함하는 구성주의의 가능성을 열고 싶었던 것이다. 두스부르흐는 그 야망을 러시아 구축주의자 엘 리시츠키와의 만남을 통해 구체화하게 된다.

두스부르흐

두스부르흐

테오 판 두스부르흐가 그로피우스를 처음 만난 것은 1920년 베를린의 브루노 타우트의 집에서였다. 타우트는 그로피우스의 젊은 날의 여러 장면을 함께 한 동료로, 독일 표현주의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였다. 두스부르흐는 그로피우스에게 네덜란드 데 스틸 그룹의 활동과 내용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이제 막 시작한 바우하우스의 목표를 앞서 실행하고 있던 데 스틸의 활동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로피우스는 이듬해 1월에 그를 바우하우스로 초대했다. 그로피우스도 자신의 바우하우스를 자랑하고 싶었다. 그 뿐이었다. 그러나 두스부르흐는 그로피우스가 자신을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로 초빙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당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로 초빙받는 것은 무척 영예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로피우스는 처음부터 그 누구와도 함께 일할 수 없는 두스부르흐의 특이한 성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미 두스부르흐 만큼이나 특이한 요하네스 이텐의 독불장군식 행동 때문에 충분히 고민하고 있었다. 훗날 그로피우스는 두스부르흐를 자신의 바우하우스 후임 교장이었던 하네스 마이어와 비교하며 이렇게 단 한 문장으로 평가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주장대로 사는 가이다. 두스부르흐는 이 본질적 측면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마이어는 자신의 주장대로 살았다.’ 두스부르흐는 허풍장이라는 이야기다.

사실 마이어와 그로피우스의 관계는 그리 좋게 끝나지 않았다.  마이어가 바우하우스 교장에서 쫓겨나는 과정에 그로피우스의 그림자가 깊게 드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피우스는 하네스 마이어를 높이 평가했다.

아무튼 두스부르흐는 1921년부터 1922년까지 바우하우스에 머물렀다. 클레의 바로 아래층에 방을 얻었다. 그로피우스가 자신에게 바우하우스의 수업을 허락하지 않자, 아예 사설 학원을 차렸다. 이텐의 예비과정을 ‘표현주의적’, ‘낭만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주로 건축과 관련된 수업을 진행했다. 바우하우스에 불만을 가진 많은 학생들이 그의 수업을 들었다. ‘건축 아래 모든 예술의 통합’이라는 슬로건을 보고 건축공부를 하려고 바우하우스를 찾았던 학생들이었다. 그로피우스는 재정적 압박으로 돈이 가장 많이 드는 건축공방의 개설은 엄두도 내지 못 할 때였다.

두스부르흐, 문제적 인물의 등장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당시 두스부르흐가 바우하우스 학생들에게 미친 영향을 아주 확실하게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당시 바우하우스 학생이었던 헤르베르트 바이어(Herbert Bayer, 1900~1985)가 남긴 바우하스 교장실의 투시도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 디자인에 대한 영감을 얻은 애스펀 리조트를 설계한 바이어는 두스부르흐나 이텐 못지않게 특이한 인물이었다. 후에 그래픽 디자이너로 유명해지지만 원래는 건축을 공부하려고 바우하우스에 입학했다. 그러나 건축수업이 개설되지 않자, 공개적으로 그로피우스와 바우하우스를 비판하며 두스부르흐의 사설 강좌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바우하우스에 계속 머물며 한 때 인쇄공방의 마이스터를 역임하기도 했다. 바우하우스 폐쇄 후 히틀러의 추종자가 되어 나치 프로파간다에 적극 간여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치에 의해 ‘퇴폐 예술가’로 낙인 찍혀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다. 훗날 그는 바우하우스 학생시절, 그로피우스의 두 번째 부인인 이제 그로피우스와 몰래 사랑을 나눴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교장 사모님’과 불륜관계였다는 거다. 대담한 사내다.

헤르바르트 바이어의 바우하우스 교장실 투시도는 ‘엑소노메트릭(축측 투영, axonometric projection)’, 더 정확하게는 ‘아이소메트릭(균등각 투영, isometric projection)’방식으로 그려졌다. 이는 당시 독일 건축계에서는 아주 낯선 방식의 투시도였다.

이 맥락에서 3차원의 사물을 2차원으로 묘사하는 투시도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필요하다. 일단 3차원의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2차원에 묘사하는 방법이 ‘원근법(perspective)’이다. 소실점을 하나로 고정하여 대상을 원근법적(더 정확히는 선원근법적)으로 묘사하는 투시도를 ‘중심투영(central projection)’이라 한다.

그러나 원근법적 투시도는 눈에 비치는 그대로 그리는 인간중심의 도법이다. 수학적 혹은 기하학으로 정확한 묘사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대상중심의 방법을 ‘평행투영(parallel projection)’이라 한다. 대각선의 각도에서 대상의 3면을 바라보는 ‘축측 투영(axonometric projection)’ 즉 ‘엑소노메트릭’은 평행투영의 대표적 방식이다. 축의 각도에 따라 ‘축측 투영’은 또 다시 나뉜다. 보이는 3면의 각도가 각각 120도로 동일한 ‘아이소메트릭’즉 ‘균등각 투영’, 2면의 각도만 동일한 ‘2등각 투영(diametric projection)’, 그리고 각각의 각도가 상이한 ‘부등각 투영(trimetric projection)’이다.

바우하우스의 헤르베르트 바이어의 아이소메트릭 투시도와 두스부르흐, 그리고 러시아 구축주의의 관계가 가지는 의미는 다음 호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바우하우스가 2차원 평면의 구성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3차원 공간구성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두스부르흐는 박쥐의 바이러스를 옮기는 숙주와 같은 존재였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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