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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 나의 바둑<1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오늘 내가 있기까지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은혜를 입었다. 스승 뇌월헌작 선생은 물론 이고 조남철·김인 국수 등 국내외의 선배로부터도 격려받고 가르침도 받았다.
김인 선배는 내가 목포에서 올라왔을 때 어린 나를 직접 가르쳐 주었다
꼭 감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될 어른이 한분 있다. 이학진 선생이시다.
이 선생은 의친왕 이강의 사위로 어려서부터 바둑을 좋아했다. 일본에 가 당시 소년기사였던 판전영남에게 바둑을 배웠다. 그래서 아마추어로는 상당히 높은 기력을 지녔다.
평생 바둑을 놓아하고 바둑두는 사람을 도와주려고 애썼다.
목포에서 지물포를 하다 오직 기재 있는 아들 하나를 대성시키겠다는 생각 하나로 가산을 정리해 「눈 감으면 코베어간다」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온 가친이 서울에서 만나 의지하게 된 사람이 선생이셨다.
지면이 넓은 선생은 어린 소년 하나가 기재가 있으니 도와주라고 명문가에 권유했고 그로 해서 나와 우리 집안은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바둑을 둔다는 것은 가난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요즘은 신문·방송의 기전이 많아 프로기사가 되고 조금만 두각을 나타내면 생계에 지장은 없다. 그러나 60년대에는 정상급이라도 살아가기가 고달팠다.
그때 선생은 기사들을 물심으로 도와주었는데 특히 어린 나를 예뻐하여 늘 보살펴주었고 직접 바둑도 가르쳐 주었다. 나중에 내가 기력이 향상되어 직접 가르칠 수 없게 되자 김인 선배에게 『자네가 훈현이를 가르쳐주게 』하고 부탁하여 주었다. 어릴 때의 가르침은 평생 간다. 나는 그분들에게 참으로 큰 은혜를 입었다.
서봉수 9단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서 9단은 15년 가까이 나의 라이벌이 되면서 내가 커나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누구라도 혼자서 커나갈 수는 없다. 항상 자극을 주고 분발하게 해주는 상대가 있을 때 커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대국보도 실으면서 자세하게 쓰겠지만 그는 중요한 고비마다 호적수가 되면서 나를 공부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등택수행과 판전영남의 사이도 그렇게 오청원과 목곡실의 경우도 그렇듯이 바둑은 숙적이 있을 때 발전했다.
『삼국지』를 보면 오나라의 주유가 죽으면서 「하늘이 여 어찌 이 주유를 낳으면서 또한 재갈공명을 내보내셨나이까」라고 탄식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세상사라는게 다 그러하여 숙적이 있게 마련인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조제비」란 별명을 얻었다. 등산을 좋아하여 선·후배 기사들과 산에 자주 오르는데 몸이 가벼워 잘 움직인다. 어느 날 함께 산을 오르던 강철민 선배가 『조왕위는 제비처럼 날렵하단 말이야』하고 말했는데 나중에 한국기원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자 기사들이 산타는 것만 아니고 바둑도 그러하다고 하면서 「조제비」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선·후배들에 따르면 나의 바둑은 행마가 워낙 빠르고 날렵하여 잡기가 힘들다고 한다. 또 제비가 먹이를 보면서 번개처럼 날아가 잡는 것처럼 상대의 약점을 놓치지 않고 추궁하여 이긴다는 것이다.
또 권투선수 알리가 아웃복싱을 하면서 잽을 자주 구사하여 상대를 넉아웃시키는 것처럼 내 바둑도 실리를 부지런히 챙기고 상대가 세력을 쌓아놓은 곳에 가볍게 뛰어들어 깨뜨려버려 승리를 낚아낸다고 보고 있다.
「조제비」란 별명을 나는 썩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별명이란 것이 다른 사람들이 지어 자기들이 즐겨부르는 것이니 만큼 나와 큰 관계가 없다. 그들이 좋아하면 그만인 것이다.
조치훈 본인방이 한때 「이기기 위해서 둔다」고 하여 실전적인 바둑을 두다 최근에 와서 여러 가지 다른 내용의 바둑을 시도해 보고 있다고 들었다.
스케일 큰 세력바둑도 시도하는 등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바둑도 앞으로 여러 형태로 변화를 겪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나의 기풍을 보고 또 누군가가 다른 별명을 붙여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별명은 또 그대로 좋은 별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나를 내 모습대로 표현해주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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