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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만의 모자상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25일 오후8시30분 김포공항 제2청사 1층 입국장 로비
모국방문단의 일원으로 50년만에 꿈에도 그리던 조국 땅을 밟은 사할린거주 동포1세 양병기씨(68)가 머리가 하얗게 센 노모 이태임씨(87)와 두 손을 마주잡고 아리랑을 부르며 춤추고 있었다.
꽃다운 나이 17세. 성실하고 우직한 농군이었던 그에게 징용 통지서가 날아든 날 그의 어머니는 신혼의 며느리에게『곧 좋은 세상이 오고 남편도 돌아오게 된다』며 위로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고향 순창을 떠나는 길에서 그는 같은 처지의 청년들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아리랑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낯선 사할린탄광의 막장에서 일제의 소모품이 돼 희망없는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도 기어코 조국 광복의 감격적인 소식은 찾아들었다.
기쁨도 잠깐, 다른 동료들과 함께 소련정부에 의해 강제 억류 조치를 당한 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에 가슴을 쳐야만했다.
『억장이 무너질 듯 한 슬픔과 분노, 그리고 절망과 체념의 끝에서 동료들과 함께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마침내 그는 돌아왔다.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2남1녀의 아버지로, 생활을 위해 한국국적을 포기한 소련인으로, 인생을 거의 다 살아버린 노인이 돼 청명한 고국의 가을하늘 아래에 안겼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의 운명처럼 달라져 있었다. 애처롭기만 했던 어린 아내는 오래 전에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30대 초반이었던 어머니는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맏아들을 기다리다 지쳐 머리가 하얗게 세 버렸다. 노모는『너무 늙고 주름살이 많아 알아보기 조차 어렵다』 며 비정한 세월을 원망했다.
할 말을 잃은 양씨의 두 눈이 가물거려 왔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양씨는 조용히 두 손을 내밀어 노모의 여윈 손을 잡았다. 그리고 원을 그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고통과 수난의 연속이었던 한국 근 현대사, 그 최대의 피해자들인 6만 사할린 교포의 한이 서울의 하늘아래서 강물처럼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이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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