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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못견뎌 거짓 자백했는데…청주 무죄, 화성8차 유죄 왜

중앙일보

입력

"같은 상황, 다른 판결…"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옥고를 치른 윤모(52)씨와 1991년 1월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에서 발생한 여고생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몰렸던 박모(47)씨의 얘기다. 두 사건 모두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피의자 이춘재(56)가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윤씨와 박씨는 당시 경찰의 고문 등 가혹 행위로 거짓 자백을 해 재판에 넘겨졌다고 주장했다. 이중 윤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20여년에 걸쳐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반면 박씨는 1·2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두 사람이 다른 판결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심에서 혐의 인정했던 윤씨, 국과수 감정도 한 몫

윤씨는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1989년 7월 경찰에 붙잡혔다. 사건 발생(1988년 9월 16일) 10개월 만이었다.
경찰은 당시 윤씨의 체모와 범행 현장에서 찾은 용의자의 체모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로 보내 방사성 동위원소 감별법으로 조사했는데 일치한다는 결과를 받았다.
윤씨는 살인 및 강간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윤씨)이 법정과 검·경에서 부합하는 진술(자백)을 했고 국과수가 작성한 감정의뢰 회보고서(방사성 동위원소 조사 결과)도 부합(일치)한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년을 복역한 뒤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윤모(52)씨가 지난달 30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참고인 조사를 위해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년을 복역한 뒤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윤모(52)씨가 지난달 30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참고인 조사를 위해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윤씨는 2심에서 기존 진술을 뒤엎었다. "범행 당시 친한 선배와 잠을 자고 있었고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허위 진술을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윤씨의 결백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경찰 이래 원심 재판까지 일관되게 자신의 범행을 시인하고 침입 경로와 범행 후 피해자의 유기상태, 범행내용, 도피 경로를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며 "특히 범행현장과 피고인의 음모에 대한 감정의뢰 회보고서 및 소견서 등을 종합해 보면 피고인의 범행 사실을 인정하기 충분하다"며 원심판결을 유지했다.
대법원도 "원심판결은 정당하다"며 무기징역을 확정하면서 윤씨는 2009년 가석방되기 전까지 20여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박씨 "1심 재판부터 일관되게 범행 부인"

1991년 1월 청주시 가경택지개발공사장의 한 하수관에서 B양(당시 17세)이 숨진 채 발견됐다. 인근에서 30대 여성의 강도 피해 사건도 발생했다. 박씨는 사건 발생 몇 개월 뒤 이 사건의 용의자로 붙잡혔다. 박씨는 강간치사와 강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2년에 걸친 재판 끝에 법원은 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중앙일보가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실에서 입수한 박씨의 1심 판결문에 따르면 박씨는 검찰 조사 단계부터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이에 담당 검사는 박군의 조사 과정을 녹음한 내용을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진술거부권이 있다'는 내용을 고지하지도 않고 조사를 해 '위법하게 수집'된 것으로 판단돼 증거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1994년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한 뒤 살인한 혐의로 검거돼 옷을 뒤집어쓴 채 경찰조사를 받고 있는 이춘재 [연합뉴스]

1994년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한 뒤 살인한 혐의로 검거돼 옷을 뒤집어쓴 채 경찰조사를 받고 있는 이춘재 [연합뉴스]

"박씨가 범행을 시인하는 것을 들었다"던 일부 증인은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다.
강도 피해자였던 30대 여성의 진술도 조사 때마다 엇갈렸다. 이 여성은 1차 진술에선 "용의자가 30세가량의 키 172㎝의 남성으로 얼굴이 둥글고 작았다. 얼굴 윤곽은 정확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2일 뒤 2차 조사에선 "얼굴이 둥근형에 작고 키는 174~175㎝. 나이는 20대 중반에서 30대 정도"로 바꿨다. 박씨가 용의자로 지목된 이후에도 "목소리가 범인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가 "범인과 목소리는 다르지만 박씨가 범인인 것 같다" 등 진술이 오락가락했다.

1심 재판부는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증거능력이 없고 피해자 진술엔 신빙성이 없다"며 "유죄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항소했지만 박씨는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씨는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경찰의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했었다"고 털어놓기로 했다. 그는 "당시 경찰이 잠을 재우지 않고 자백을 유도했다"며 "먹다 남은 짬뽕 국물을 이용한 고문도 해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30년 뒤 "허위 자백", 윤씨 재심 준비 

윤씨는 수감된 이후 "누명을 썼다"고 호소했다. 경찰의 가혹 행위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경찰관들은 "가혹 행위는 없었다"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윤씨의 결백을 입증할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먼저 이춘재가 8차 화성 살인 사건도 자신의 소행이라고 자백했다. 이춘재는 범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피해자의 마지막 모습과 주변 현장 상황을 설명했다고 한다. 피해자가 이사 오기 전 이춘재의 친구가 이 집에 살았고 자주 드나든 사실도 드러났다.
판결문 속 "슬리퍼를 신은 윤씨가 담을 넘어 피해자의 방으로 들어갔다"는 내용도 사실과 다르다는 정황이 나왔다.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A양의 집[중앙포토]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A양의 집[중앙포토]

피해자의 집 담은 얇은 조립식 콘크리트 담으로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윤씨가 넘기 어렵다.
윤씨는 앞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수사기록엔 담을 넘었다고 돼 있는데 넘지 않았다. 그 시절 시골 담은 비가 오면 흔들거렸다. 내가 담을 잡았을 때도 흔들거려서 현장검증 때 넘는 시늉만 했다. 뛰어넘었으면 담과 같이 쓰러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윤씨는 당시 불편한 다리 때문에 슬리퍼를 주로 신었다. 슬리퍼를 신고 담을 넘기도 어렵다. 그런데 일부 유가족은 "범행 당시 운동화로 추정되는 발자국이 있었다"는 진술을 했다고 한다.

윤씨의 재심을 돕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는 "범행 현장과 윤씨의 신체적 상황이 맞지 않는데도 사실관계를 교묘하게 조작한 정황이 있다"며 윤씨의 무죄를 확신했다.
윤씨 측은 11월 중순쯤 수원지법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최모란·최종권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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