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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영 전 국무총리 89년 삶…외교부 숙정 막은 집념 승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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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신영 전 국무총리     (서울=연합뉴스)

노신영 전 국무총리 (서울=연합뉴스)

 노신영은 모범이다. 그의 삶은 반듯하다. 그런 평판은 오랜 세월 축적됐다. 그는 직업 외교관(1953년·고등고시 4회)으로 출발했다. 5공 전두환 정권의 외무장관·안기부장·국무총리를 지냈다. 5공의 권력은 군부에서 나왔다. 그는 그 속에서 민간인 출신의 간판이었다. 모범은 틀 속에 머무르려 한다. 하지만 노신영의 모범생 드라마는 긴박하다. 그 속에는 파격과 긴장, 교훈과 흥미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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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외무장관 취임은 1980년 9월. 전두환 정권의 첫 외교 사령탑이었다. 그 무렵은 10·26, 12·12, 서울의 봄, 5·18로 이어진 격동의 시절이었다. 그때 신문기사는 이렇다. “많은 선배 외교관을 제친 발탁 인사다. 인도와의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주역이었다.”

그는 전 대통령과의 첫 대면을 이렇게 기억했다. “당신이 노신영이오. 정보보고를 보니 괜찮다고 해서 장관을 시켰소. 『노신영 회고록』” 그에게 주어진 핵심 과제는 두 가지였다. 밖으로는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 확보다. 안으로는 외교관 숙정(肅正) 작업이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5공 정부는 대규모 인사로 공무원 사회를 재편·장악하려 했다. 외무부에 할당된 퇴출 인원은 69명. 노신영의 고민은 깊어 갔다.

모범의 덕목은 신중하면서 지혜롭다. 그는 반전(反轉)의 기회를 모색했다. 최고 통치자의 결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번복 시도는 권력의 역린(逆鱗)을 건드릴 수 있다. 그는 설득의 언어를 다듬었다. “직업외교관 한 명을 기르는 데 엄청난 투자를 한다. 이들의 대량 해임은 크나큰 국가적 소실이다.” 그는 외교 실적을 쌓았다. 다음해 2월 전두환의 미국 방문 외교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는 최적의 순간을 낚아챘다. 대통령에게 숙정 재고를 요청했다. 전두환은 난감해 했다. 다른 부처에선 해임 문제가 매듭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두환은 노신영의 정성과 집념을 최종 수용했다. 그것은 노신영의 생애에서 최고의 순간이다. 모범이 성취되고 승리하는 장면이다. 그것으로 축출 대상 중 거의 전부(66명)를 살려냈다. 그때 구제된 인물은 나중에 우리 외교의 중추로 활약했다. 그것으로 외교부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런 풍광은 지금의 외교부 처지에서 상상하기 힘들다.

모범은 평범하지 않다. 모범이 원숙해지면 파격을 선택한다. 1984년 9월 그의 안기부장(지금 국정원장) 때다. 그 무렵 중부지방의 집중호우로 피해는 상당했다. 북한은 이재민 구호를 제안했다(쌀·시멘트·포목·의약품). 북한은 오판했다. 한국 정부가 거부할 것으로 믿었다. 그 상황에서 그의 도전적 발상이 나온다. 그는 이렇게 확신했다. “국제사회는 한국의 경제력이 북한보다 월등함을 안다. 제의를 수용해도 나라 체면이 손상되지 않는다. 허(虛)를 찔러야 한다.”

정부는 구호물자를 받기로 했다. 평양 정권은 당황하고 난리가 났다. 북한의 경제난은 심각했다. 그 와중에 물품 조달은 생고생이었다. 국민은 북한의 어두운 실상을 실감했다. 구호물자 제안은 김정일의 기습적 발상이었다. 노신영의 역발상은 통쾌한 역습이었다. 그것은 전두환 대 김일성의 대결이기도 했다.

노신영은 국무총리(1985년 취임)였다. 언론의 소개는 이랬다. “군고구마를 팔며 자수성가한 키 큰 청년이 재상이 됐다.” 그의 위치는 절대 권력자 아래다. 그는 총리의 역할 공간을 조심스레 조정했다. 야당은 그의 존재감을 대충 무시했다. 그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와 함께 ‘노-노 체제’를 구축했다. 그의 신언서판(身言書判)은 주목을 끌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의 후계자 대열에 오르기도 했다.

1987년 5월,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 무렵 ‘박종철 고문 축소 조작’으로 나라가 흔들렸다. 그는 정치·도의적 책임을 졌다. 32년간의 공직생활 마감이다(58세). 그 이후 그는 집과 전원을 오갔다. 시골에서 쌀농사를 직접 지었다. 그는 롯데복지·장학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산재 외국인 근로자와 소년·소녀 가장을 지원했다. 대학 강단(고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에 서기도 했다. 노신영은 다시는 공직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국민 세금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런 결별 자세는 모범생의 오기와 자부심이었다.

고인은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1930년생). 평양 제2공립중학(평양고보 후신)의 수재였다. 해방 후 서울로 내려왔다. 서울법대에 입학했다. 반기문의 유엔 총장 취임 때다. 노신영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즐거움을 표시했다. 그는 대학동기동창과 결혼했다(1954년). 10년 전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떴다. 에머슨의 시(‘무엇이 성공인가’)에 대한 그의 애착은 커졌다.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박보균 대기자

※유족으로는 경수(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철수(아미커스 그룹 회장)씨가 있다. 둘째 사위는 류진 풍산 회장이다. 류 회장은 "장인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로 무엇보다 군사정권 시절 국민의 안전을 위해 모든 외교적 노력을 다했다는 점을 기억해주셨으면 한다"고 했다. 첫째 며느리는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의 동생인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딸 정숙영 가교아트 대표다.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의 누나이기도 하다. 둘째 며느리는 고(故) 홍진기 중앙일보 전 회장의 딸이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부인 홍라희씨의 동생인 홍라영 전 삼성미술관 리움 총괄부관장이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25일 오전. (02)2072-2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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