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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악, 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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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요즘 세태는 긴 말이 필요 없다. '헉' '악' '윽' 단 세 마디면 끝난다. '헉'은 갑작스레 허를 찔릴 때 지르는 외마디다. '악'은 말 그대로 악 소리가 나는 상황에서 내지르는 비명이다. '윽'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맞은 데 또 맞고, 찔린 데 또 찔려 결정적으로 쓰러져 버릴 지경에 이를 때 나오는 절망적 한숨이다.

북한이 미사일 일곱 발을 날렸을 때 인공위성 운운하며 결코 그럴 일 없을 것이란 소리에 길들여져 있던 대한민국 사람들은 허 찔린 듯 '헉' 하는 외마디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직후에 열린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북의 내각 책임참사라는 자가 장관급입네 하고 내려와서는 북의 선군 덕분에 남한 사람들이 덕 보고 있다고 강변하며 쌀 50만t을 내놓으라고 되레 호통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악' 소리를 냈었다. 그런데 이번엔 북의 뜻대로 고분고분 달라 할 때 주지 않는다고 일방적으로 이산가족 상봉 중지를 선언하더니 급기야 금강산에 면회소를 건설하기 위해 나가 있던 남측 관계자들에게 당장 철수하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국민이나 정부 모두 하도 어이없어 '윽' 하는 외마디만 삼키게 됐다. 정부가 그동안 불면 날아갈까, 놓으면 깨질까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남북 관계라는 게 이렇게 허접스러울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정말이지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런 와중에 국민은 호들갑 떨던 태풍도 지나가서 별일 없겠지 하던 참에 별다른 예보도 없이 하늘에 구멍난 듯 쏟아진 집중호우에 '헉'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며칠 계속된 비에 곳곳에서 산사태가 나고 도로가 끊기고 집이 통째로 쓸려나갈 지경이 될 만큼 나라 곳곳이 절단나 버려 '악' 소리가 온 나라를 진동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비에 약한가 했더니 싸게 싸게, 빨리 빨리, 대충 대충 한 것이 화근이었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십수 년간 댐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한 것이 원인 중 하나였음을 알게 됐다. 절반의 인재(人災)였던 것이다. 어찌 '윽' 하는 통한의 외마디가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평일에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그것도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인 통에 자동차로 10분 거리를 두 시간 넘게 길바닥에서 꼼짝없이 갇혀 있는 경험을 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어이없고 황당해 '헉'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직접 교섭 대상도 아닌 원청사를 상대로 한판 흥정해 보겠다며 엉뚱하게도 포스코 본사 건물로 난입한 포항지역 건설노조가 열흘 가까이 점거농성을 벌인 통에 포스코는 업무가 마비되고 그동안 쌓아 왔던 이미지마저 실추됐다. 덩달아 포스코와 연관된 업체들은 물론 주변 음식점들마저 '악' 소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건설노조원들이 LP가스통으로 사제 화염방사기를 만들어 난사하자 나이 어린 전경들이 힘에 부친 듯 간신히 방패로 막다가 화상 입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어찌 '악' 소리를 다물 수 있겠나.

더군다나 한창 수출에 바빠야 할 현대자동차의 수출 전용 부두 야적장이 현대자동차 노조의 20일 가까운 파업으로 텅 빈 가운데 수출 중단 사태에 이르게 된 상황을 보고 해당 기업과 국민은 '윽' 하는 외마디 소리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모자라 민주노총 울산본부가 회식 중단과 백화점.할인마트 안 가기 운동을 벌이는 등 초유의 '소비 파업' 마저 벌여 지역경제가 마비되고 지역 자영업자들의 생계를 위협하기에 이르니 엎친 데 덮치고, 맞은 데 또 맞고, 찔린 데 또 찔려 곳곳에서 '윽' 하는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지경이 됐다.

한마디로 요즘 대한민국은 미사일에 '헉' 하고 홍수폭격에 '악' 하고 파업폭탄에 '윽' 하는 '헉, 악, 윽'의 전쟁판이 돼 버린 것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