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고이즈미 곤란하게 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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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주 독일과 러시아 방문 중에도 백악관과 일본 총리 관저 간 '핫라인'을 가동해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안 문제를 긴밀히 논의했다고 일본 언론이 20일 전했다. [워싱턴 로이터=뉴시스]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 이후 유엔에서 대북 제재 결의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이 더 없이 긴밀하게 움직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독일과 러시아를 방문하는 와중에서도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통해 일본 정부와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고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20일 보도했다. 부시 대통령은 해들리 보좌관에게 이 문제를 처리하는 큰 원칙 하나를 제시했는데, 그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를 곤란케 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신문은 전했다.

백악관과 일본 총리 관저 사이에 '핫라인'(비상통신망)이 가동된 것부터 부시 대통령의 뜻이었다고 한다. 부시의 뜻을 전달받은 해들리 보좌관은 바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 관방장관의 휴대전화 번호를 수소문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중동 국가 방문과 러시아에서 열린 G8(주요 8개국) 정상회의 참석 때문에 관저에서의 외교 전략은 아베 장관이 지휘하고 있었다. 이후 해들리 보좌관은 부시 대통령을 수행해 독일과 러시아로 바쁘게 이동하면서도 아베 장관과 수시로 통화하며 상황 변화에 대처했다.

'해들리-아베'라인을 통해 가장 먼저 결정된 것은 '결의안 표결 일시 연기'였다. 그때 중국 정부는 북한 미사일 해법을 찾기 위해 평양으로 협상단을 보내면서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런 요청을 받은 해들리 보좌관은 아베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여기서 결의안 표결을 강행하면 나중에 중국이'시간만 있었으면 북한을 설득할 수 있었다'고 나올 수 있다. 일단 중국이 북한을 설득하는 과정을 지켜보자"고 말했다.

의미를 알아차린 아베 장관은 바로 수락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의안 채택 시한을 정했다. G8 정상회의에서 미.중 정상이 별도 회담을 하기 직전으로 설정했다. 무언의 압력이었다.

그때 무력동원 가능성을 담은 '유엔헌장 7장 삭제'를 양보하지 않기로 한 것도 중국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통화를 거쳐 결의안 채택 직전인 16일 오전 1시 마지막으로 아베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해들리 보좌관은 "결의안에서 헌장 7장을 빼도 (7장을 대신하는) 문구에 구속력이 있다. 중국도 찬성할 것이다"고 말했다.

아베는 "그렇다면 헌장 7장 삭제를 고려할 수 있다. 다만 구속력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해 두자"고 수정 결의안에 동의했다. 해들리는 "일본 외교의 대승리(triumph)"라며 아베를 치켜세웠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 외무성도 그동안 총리 관저와 백악관 사이에 직통라인이 가동한 예가 한 번도 없었다며 놀라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부시 대통령이 해들리 보좌관을 통해 아베 장관과 접촉한 것은 그가 고이즈미를 이을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사실 외에 두 사람이 서로 자국 외교노선을 종합, 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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