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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있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23)

매년 챙겨가는 문화 이벤트가 있다. 독립출판물 책방과 제작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 간의 작업을 선보이는 ‘퍼블리셔스테이블(Publisher’s Table)’. 올해로 5번째를 맞은 이 행사가 지난 9월 28일과 29일 한남동 디뮤지엄에서 열렸다.

지역마다 흥미로운 컨셉의 독립서점들이 생겨나고, 1인 출판 혹은 뜻이 맞는 지인 몇명이 팀을 꾸려 개성 강한 책과 잡지들을 만들어내는 추세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요즘, 그런 출판물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의 장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독립 출판에 비해서는 큰 규모의 유통과 자본, 인력을 활용하여 오랜 기간 잡지를 만들어오고 있는 나에게는 이 자리에서 만나는 젊은 창작자들의 관심사와 열정, 크리에이티브한 결과물들은 또 다른 자극과 영감이 된다.

독립출판물 책방과 제작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 간의 작업을 선보이는 ‘퍼블리셔스테이블(Publisher’s Table)’. [사진 김현주]

독립출판물 책방과 제작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 간의 작업을 선보이는 ‘퍼블리셔스테이블(Publisher’s Table)’. [사진 김현주]

이번 행사에는 써니사이드업, 취향관, 프로파간다시네마, 디자인 이음, 썸북스 등 253팀의 국내외 제작자가 참여했다. 출판사별로 마련된 작은 테이블에는 단행본, 일러스트북, 잡지, 엽서와 스티커 등 다양한 작업물들이 꽉 차게 놓여 있었고, 전시장 벽면에는 그것들을 한눈에 가늠하게 하는 포스터들이 일렬로 붙어 있었다. 관람객들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창작자의 설명을 듣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도 하며, 마음에 드는 책이나 잡지 등을 그 자리에서 구매하기도 한다.

나 역시 긴 관람객의 줄을 따라 테이블들 위에 놓여있는 작업물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는데, 올해 유독 눈에 띄는 작업물들이 있었다. ‘세대의 이해’를 주제로 부모와 노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책들이 그것이다. 지역 문화, 여행, 몸과 마음의 밸런스, 반려동물, 디자인과 문화, 서브 컬쳐 등은 독립출판물로 익숙한 내용인데 반해. 나이 든 사람을 대상으로 만들어 내는 창작물이 이렇게 많이 눈에 띈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독립출판 제작자들은 20, 30대 젊은 세대들이 많다. 그러니까 이 작업물들은 젊은 세대가 바라보는 60대 이상 세대들의 삶인 셈인데, 대상은 부모가 되기도 하고, 특정한 노인이 되기도 했다. 내가 발견한 몇 권의 작업물을 소개한다.

엄마를 인터뷰할 수 있는 노트「그 여자의 자서전」.

엄마를 인터뷰할 수 있는 노트「그 여자의 자서전」.

먼저 엄마에 관한 책이다. 허스토리에서 제작한 「그 여자의 자서전」은 엄마를 인터뷰할 수 있는 노트다. 엄마와 마주 앉아 엄마의 인생을 담는 이야기를 묻고 적어낼 수 있는 노트인데, 인터뷰 기초 자료 만들기부터 인터뷰의 주제, 생애 연대기표 등 노트 안의 내용을 채우다 보면 노트 자체가 엄마의 자서전이 되고, 이걸 바탕으로 스스로 출판을 기획해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가 엄마와 나누었던 대화와 일상을 그림과 글로 담아 놓은 책「딸의 정석」.

작가가 엄마와 나누었던 대화와 일상을 그림과 글로 담아 놓은 책「딸의 정석」.

이정석 작가의 드로잉에세이「딸의 정석」은 작가가 엄마와 나누었던 대화와 일상을 그림과 글로 담아 놓은 책인데, ‘그림을 그리며 엄마를, 딸인 자신을, 그리고 모녀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작가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책도 있다.

「송해임 인터뷰집-야 멘스가 마르는데 무슨 연애가 되냐」는 할머니 손에서 20년 넘게 키워진 손녀 박소혜 작가가 팔순을 앞둔 할머니의 인생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기획된 책이다. “나는 송해임입니다. 저는 부모가 있어도, 있으나 마나였고 여덟살 때부터 직접 밥을 지어 먹고 살아왔습니다”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나의 소중한 분들의 인생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제주에 사는 러시아 일러스트 화가 Nika Tchaikovskaya의 그림책「해녀 리나-해녀 할머니의 하루」.

제주에 사는 러시아 일러스트 화가 Nika Tchaikovskaya의 그림책「해녀 리나-해녀 할머니의 하루」.

가족이 아니더라도 멋지게 나이가 든 이들을 담은 작업물도 있다. 「해녀 리나-해녀 할머니의 하루」는 제주에서 사는 러시아 일러스트 화가인 Nika Tchaikovskaya의 그림책이다. 그녀가 바라본 제주와 그 제주를 더욱 경이롭게 만드는 제주 해녀의 모습을 해녀 할머니의 하루를 따라 소개하고 있다. 바닷속에서 발레리나처럼 춤추는 해녀 리나 할머니의 모습은 평생 물질을 하며 지내온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귀한지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하정 작가의 여름 한 달간의 기록「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하정 작가의 여름 한 달간의 기록「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하정 작가의「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는 73세 은발의 덴마크 엄마 아네뜨와 딸 쥴리,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가족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아네뜨의 아버지 어위와 함께 지낸 작가의 여름 한 달간의 기록이다. 어위, 아네뜨, 쥴리로 이어지는 3대의 삶과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읽다 보면 가족과 함께 세월을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할 계기가 된다.

유쾌한 일러스트 작업도 있다. UYADA .STUDIO의 작가는「내가 늙고 싶은 모습」을 그려 포스터와 스티커, 엽서로 제작했다. ‘노년의 여유를 동경하며 노인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지에서 만난 노인들은 건강하고 충분히 주체적이었습니다. 저에게 노년이라는 시기는 너무나 막연하게 멀기에 막연하게 두려웠지만, 그들을 만나고 잘 늙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처럼 건강하게 나이 들기를 바라며 사랑스러운 노인분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노인을 만나며 당신의 몸과 마음도 건강하게 무르익기를 바랍니다.’라는 작가의 멘트처럼 그녀의 작품 속 노인은 유쾌하고 당당하고 자신의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모습이다.

멀티미디어로 접근한 제작물 「어서와 어르신은 처음이지」는 회화와 영상 작업을 하는 현지윤작가의 뮤직비디오 촬영 작업기다. 2017년 20명의 다채로운 노년의 삶을 사진과 영상, 인터뷰집으로 풀어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에 이은 프로젝트로 ‘어르신 SWAG’ ‘어랍쇼’, ‘어르신 블루스’의 세 개의 뮤직비디오와 함께 출간되었다. 춤과 노래를 부르는 뮤직비디오 속 노인들은 그 어떤 젊은이들보다 유쾌하고 행복해 보이는데, 이렇게 작가의 작품들은 노인의 삶과 문화, 연륜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한다.

세대 갈등에 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세대에 따른 가치관의 격차는, 세대별로 살아온 시간과 당면한 삶이 다르기에 당연할 수밖에 없다. 이해와 관심이 있으면, 차이가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독립출판 작가들의 작품을 보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서로에 대한 외면과 비난 대신,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젊은 세대들이 다정하게 내미는 손! 그들과 크게 한 발짝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김현주 우먼센스 편집국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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