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서 만났던 이상조씨|″54년까지 북침 인줄 알았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6·25당시 인민군부 총 참모장, 휴전회담 수석대표였던 이상조씨 (74) 가 곱게 늙은 70노객의 모습으로 마침내 우리 앞에 나타나 그를 둘러싼 미스터리, 그만이 알고 있을 어떤 비화들이 일부나마 공개될 것 같다. 그가 기자회견을 갖고, 그리고 개방사회에 일단 노출되고 나면 그는 이제 더 이상 호기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씨를 지난 6월의 시점, 모스크바라는 특수한 지역에서 만나는 일은 마치 007작전 같은 생각이 들었다.
크렘린 건너편에 위치한 내셔널호텔 519호실에서 과연 그는 제3자를 통해 약속한대로 전화를 할 것인가 하고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버저가 울렸다. 문을 여니 거기 이 만남을 주선한 모스크바 동포 Q씨와 함께 단정한 정장차림의 백발노인이 서있다. 전화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양동작전 이었던 것 같고 그 사이 이씨는 그가 사는 민스크로부터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는 꼿꼿하고, 음성은 카랑카랑했지만 그 자리에 그렇게 나타난 그에게서 휴전회담 당시 미국대표들이 가장 까다롭고 다루기 힘든 상대로 생각했다는 북한측 대표, 1956년 한설야 등과 함께 김일성의 개인숭배에 반기를 들려고 모의했던 반 교조주의적인 공산주의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4시간 동안의 인터뷰에는「보도시기는 합의 하에」라는 조건이 붙었다. 아직도 그 합의는 유효하지만 공지의 사실이 된 부분은 언급해도 약속위반이 안될 것 같다. 그가 받은 질문은 6·25개전 당시 상황과 소련으로 망명하게된 동기와 경위였다.
-만주에서 항일빨치산 운동을 하다 북으로 귀국해 맡은 일은.
▲귀국한 게 1946년6월인데 조선노동당의 조직부부장을 거쳐 간부부장 일을 했지요.
-개전 바로 그날은.
▲상업부 차관이었어. (이 부분에 대해 이씨 자신은 자세한 설명을 꺼리지만 북한전문가들은 그가 평양에서 남로당 간부와 정통성시비를 벌이다 술상을 뒤엎는 해프닝을 벌여 김일성이 남로당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당 간부부장이라는 요직에서 잠시 자리를 옮겨준 것이라고도 한다.)
-6·25는 남침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겠죠.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 때까지 몰랐어요. 거 왜 남조선 군이 우리를 기습공격 해 우리가 몇km 후퇴했다가 반격을 시작했다고 말한 유명한 김일성의 연설 있지 않아요. 나는 그걸 믿었어. 그만큼 비밀이 잘 지켜졌어.
-믿어지지 않는데요.
▲나하고 친한 최창익 이도 내게 아무 귀띔을 해주지 않았어요. 개전 사흘 전에 군에 있는 친구들이 찾아 와 어디며칠 다녀올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가족들 좀 부탁한다는 말을 한 게 전부였어요. 뒤에 생각해 보니 그때 물자들이 기차에 실려 자꾸 남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래도 전쟁이 임박한 줄은 몰랐어.
-선생님 보시기에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직접 동기는 무엇으로 판명되었나요.
▲박헌영의 호언장담에 넘어 간 거지. 남침만 하면 남에서 인민봉기가 일어나게 되어있다고 했어요.
-망명동기와 경위는.
▲흐루시초프가 20차 소련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연설을 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곧이어 조선공산당 대회가 열렸는데, 그전에 뜻이 맞는 동료들과 상의하여 당 대회에서 북한의 개인숭배를 문제삼기로 했어요. 한설야가 문제를 제기하면 우리가 지지발언을 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개막벽두에 김일성이 선수를 써 북조선에는 개인숭배가 없다고 선언을 해버리니 일을 섣불리 진행했다가는 큰일나겠다는 생각에 포기한 거예요. 일단 소련으로 돌아와 체코로 휴가를 갔다오니 공항에 소련공산당 간부가 나왔어요. 그가 내 동지들이 체포된 사실, 더러는 중국으로 망명한 사실을 얘기해 주었어요. 그래서 나는 소련정부에 대고 소련망명을 허락하거나 중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요구했어요. 소련 입장에서야 내가 중국으로 가는 게 싫었겠지.
이상조씨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목소리를 높여야 했고, 그래도 안되면 그와의 대화에 익숙한 Q씨가 통역을 했다. 그는 점심은 라면으로 때우면서 얘기를 하다가 동래에 사는, 한번도 만난 일이 없는 이복누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감격에 겨워 생각이 정리가 안 되는지 몇 번이고 종이를 찢었다.
『꼭 좀 전해주시오. 나는 죽기 전에 동생을 만나야 해.』 이렇게 말한 이상조씨의 소원이 생각보다 일찍 이루어진 것은 편지지 위에 떨어지던 그의 눈물을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망명 후 학자로 변신, 백러시아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에서 일본군국주의를 연구하다 은퇴하여 소설·시·회고록집필로 생활하고 있다. 【모스크바=김영희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