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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키 "일본의 수출 규제 정책은 반(反)시대적인 발상"

중앙일보

입력

'행동하는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와다 하루키 교수. [사진 한길사]

'행동하는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와다 하루키 교수. [사진 한길사]

"러일전쟁의 본질은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목적의 '조선전쟁'이었습니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행동하는 일본의 양심'이라고 불리는 와다 하루키(和田春樹ㆍ81) 도쿄대 명예교수가 러일전쟁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최근 신간『러일전쟁: 기원과 개전』(한길사·전 2권)을 펴낸 그는 24일 서울 중구 인문문화공간순화동천에서 열린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러일전쟁의 가장 큰 결과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말살하고 조선 전역을 식민지 지배한 것"이라며 "러일 전쟁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열강의 싸움이었다"고 설명했다.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러일전쟁은 20세기 세계사의 대사건이었다. 전쟁 직후 대한제국은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받았고, 그때부터 국권 침탈까지는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러일전쟁으로 승전에 취한 일본에서는 제국주의가 발호했고, 패배한 러시아에서는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하고 볼셰비키가 득세하는 직접적 계기가 됐다. 와다 교수는 이런 세계사적 관점으로 10년에 걸쳐 책을 집필했다.

와다 교수는 "러일전쟁은 조선이 일본의 소유라는 점을 러시아가 인정하게 한 전쟁이었다"며 "일본은 먼저 조선을 자국의 보호국으로 삼은 뒤, 러시아가 그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전쟁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러시아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조선을 차지하려는 일본의 목적에 의해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청일전쟁(1894∼1895년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전쟁)과 러일전쟁의 연관성도 언급했다. "10년 간격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습니다. 두 전쟁은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단일 범죄입니다." 이날 그는 청일전쟁을 '제1차 조선전쟁', 러일전쟁을 '제2차 조선전쟁'으로 명명하며 전쟁의 성격을 새롭게 규정했다.

러시아와 일본에 둘러싸인 당시 조선의 모습을 그린 풍자화. [사진 한길사]

러시아와 일본에 둘러싸인 당시 조선의 모습을 그린 풍자화. [사진 한길사]

와다 교수는 최근 한·일 외교 관계에 대해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원료에 대한 수출규제 정책을 펼치는 것은 반(反) 시대적인 발상"이라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현재 일본의 정치 지도자는 100년 전과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수출규제 정책의 배후에는 일본이 한국 대통령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자세가 깔려있다"며 "지금 일본에 한국과 중국은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정책은 일본의 절망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일본이 내년 도쿄올림픽에서 욱일기 반입을 허용한 것에 대해서는 "욱일기 사용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일본이 사용하는 일장기"라며 "일본 국민은 천황 제도를 유지하면서 일장기를 사용하고 있다. 천황도, 일본 국민도 역사적 반성을 토대로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인들이 아무리 비판을 해도 일본이 사용을 금지하진 않을 것이고, 일본 국민 스스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전했다.

1904년 2월 17일자 『 브룩클린 이글 』에 실린 '너무나도 헌신적인' [사진 한길사]

1904년 2월 17일자 『 브룩클린 이글 』에 실린 '너무나도 헌신적인' [사진 한길사]

와다 교수는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에 대한 평가도 덧붙였다. 그는 "고종은 1880년대 중반부터 1919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나라에 대한 일본의 간섭과 지배, 침략에 일관되게 저항했다"고 밝혔다. 이어 "고종의 저항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일관되게 저항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요소다.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 모르면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한국 독자들이 이책을 통해 어떤 의미를 찾길 바라느냐는 질문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교묘한 행보에 대해, 그리고 일본의 침략 때문에 망국의 위기에 떨어졌던 자국의 행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한국 독자들이 러일전쟁에 대한 기록을 읽고 관련한 논의가 확대되었으면 한다. 결국에는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기억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와다 교수는 러일전쟁과 관련된 일본·러시아·조선·청의 자료를 꼼꼼히 비교·분석했다. 책에는 러시아·일본·조선·중국·영국·미국 등 9개국의 700여명에 이르는 인물이 등장해 사실관계를 고증한다. '사건' 중심의 서술이 아닌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역사의 지류가 어떻게 러일전쟁으로 흘러가게 됐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1300쪽에 달하는 이 책은 각주만 2402개가 달려 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이웅현 한국지정학연구원 원장은 "이 책은 러일전쟁에 관해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조사한 전쟁사학의 결정판"이라며 "한국 일본 러시아의 자료를 모두 분석해 러일전쟁의 역사를 정리한 건 이 책이 최초"라고 소개했다. 이웅현 원장은 이 책의 번역을 맡았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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