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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각수의 한반도평화워치

한·일 과거사 문제는 원칙 지키되 국익 챙기면서 풀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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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일 과거사 갈등 관리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한·일 관계가 일본의 통상 규제와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로 새로운 격랑에 휩쓸리고 있다. 반세기 동안 7~8회의 위기에도 한·일 관계는 정경 분리라는 방호벽으로 관리됐지만, 이번 자유무역 원칙을 침해한 일본의 강압적 보복 행위로 깨져 버렸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본의 협력을 당연시하고 이를 전제로 한·일 관계를 구축해 왔지만, 이제 일본이 훼방꾼이 될 수도 있다는 미증유의 현실에 부딪히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달 22일 양국 안보 협력의 상징인 지소미아의 종료 조치로 갈등은 안보 분야로 번졌다. 한·일 관계 정상화는 더욱 멀어진 데다 한·미 관계에도 불똥이 튀고 있다.

과거사 해결과 역사 화해 분리로 #도덕적 우위속 총체적 해결해야 #초불확실성의 전환기 국면 맞아 #주변 친구와 지렛대 만들어가야

일본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통상 규제의 직접 원인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 징용 판결에 따른 외교 분쟁이다. 일본 정부가 금지선으로 삼고 있는 일본 기업 압류 재산 현금화가 내년 초 실현될 전망이다. 한·일 관계 파국을 막고 정상으로 되돌리는 데는 한·일 관계를 시시포스 신화처럼 만드는 과거사 벽을 넘어야 한다. 양국은 과거사로 인한 관계 악화로 무역·투자·관광·문화교류 등에서 큰 상호 손실을 입고 있을 뿐 아니라 전환기를 맞아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 나라로서 다양한 상호 협력의 기회마저 놓치는 등 기회비용도 크기 때문이다.

과거사 문제는 원칙을 세워 대응할 필요가 있다. 우선 단기 과제와 중장기 과제를 나누어 접근하여야 한다. 단기 과제는 외교 현안으로 조기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다. 강제 징용 문제는 압류 재산의 현금화 이전에 해결책 마련이 시급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후속 보완 조치가 필요하다.

과거사 문제에서 도덕적 우위 지켜야

반면 역사 화해라는 중장기 과제는 긴 안목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해결해 가야 한다. 그리고 현안 합의가 이루어지더라도 정부 간에는 최종적이지만, 민간 차원의 역사 연구·교육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과거사 해결은 피해자와 가해자인 한·일 협력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가해자의 진정한 반성·사죄가 피해자의 관용과 결합하여야 지속성 있는 해결을 가져올 수 있다. 한·일 간 사할린 한인 문제 해법은 전형적인 협력적 해결의 산물이다.

셋째, 과거사 해결은 연속성을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 외교적 해결은 상대가 있는 타협의 산물이므로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기 마련이나, 일단 합의가 성립되면 정권 변동과 관계없이 지켜야 한다. 상황 변화에 따라 조정이 필요하면 원래 합의를 토대로 보완을 꾀해야 한다. 넷째, 과거사 현안 해결에 있어 피해자 중심주의를 존중하되 전체 국익도 함께 고려하는 총체적 접근이 바람직하다. 또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의 말처럼 과거·현재·미래의 균형을 고려한 전략적 판단도 필요하다.

다섯째, 과거사 문제에 있어 우리의 도덕적 우위를 견지해야 한다. 금전적 문제는 가급적 우리가 부담하고 대신에 일본에 올바른 역사 인식과 역사 교육을 요구해야 한다. 여섯째,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피해자 의식을 극복해야 한다. 피해자 의식은 심리적 열등감을 초래해 자신을 옥죄고, 역사에 관한 자기 성찰을 통해 교훈을 얻어 미래를 개척할 역량마저 제약한다. 역사학자 부르크하르트가 얘기한 역사의 이중 기능인 과거 사회를 이해하고 현재 사회에 대한 지배를 늘리는 일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과거사 현안 해결은 이로 인해 파생된 통상 규제, 지소미아 문제와 함께 일괄 타결함이 바람직하다. 지소미아는 오는 11월 22일 실효하게 되므로 그 이전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강제 징용 문제는 “나쁜 사실은 나쁜 법을 만든다”는 법언처럼 과거 한·일 관계의 복잡한 경위가 빚어낸 법적으로 매우 어려운 사안이다. 국제법상 식민지가 독립할 때 식민 모국과 신생 독립국은 국가 승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통상 이행협정을 체결하여 양자 간의 권리·의무 승계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의 35년 식민 통치를 불법으로 보아 승계를 인정하지 않은 아주 드문 사례다.

반면 일본은 식민 통치를 합법으로 보아 양측에 현저한 입장차가 있었다. 그리하여 한·일 국교 교섭은 14년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긴 시간이 걸렸고 결국 타협을 통해 봉합하였다. 한·일 기본조약 제2조의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는 상호 모순되는 문구를 통해, 한국은 식민 통치를 원천 무효의 불법으로 해석했다. 반면 일본은 1910년 이전 대한제국과 체결한 조약들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로 실효하므로 식민 통치 자체는 합법이라고 해석함으로써, 메우기 힘든 간극을 ‘이견 합의(異見合意)’로 봉인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법원 판결은 54년 전 수교 당시의 봉인을 뜯은 셈이다.

일본에 ‘2+1’ 강제 징용 보상안 설득해야

한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조약의 교섭 당시 전승국 일원으로 참가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이 조약 제4조 1항에 따라 1965년 수교와 함께 한국의 대일 재산·권리·이익·청구권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결국 한반도 전후 처리는 전쟁 배상이 아닌 식민 통치 청산이었다. 한국 정부는 청구권 자금을 일본이 제시한 개인에 대한 직접 보상이 아닌 정부 간 일괄 타결(lump-sum settlement)로 경제 개발에 사용하였다. 대신 한국 정부는 1975년과 2007년 2회의 특별법을 제정하여 피해자들에게 보상하였다. 그리고 2005년 민관합동위원회가 구성되어 강제 징용 문제는 65년 협정으로 해결되었다고 판단하였고, 한국 정부는 2018년 대법원 판결 이전까지는 이 입장을 유지하였다. 한편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우리 헌법에 따라 식민 통치는 불법이라는 전제에 따라 65년 청구권협정에 관한 기존 해석과 충돌하고 있다.

이처럼 강제 징용 문제는 국제법과 국내법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65년 협정의 해석·적용이라는 측면에서는 국제법 문제인 반면, 식민 지배가 불법이라는 헌법에 따른 대법원 판결이라는 점에서는 국내법 문제다. 따라서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려면 양자가 상충하지 않게 하는 솔로몬의 지혜가 요구된다.

한국 입장에서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일본 기업의 참여가 필요하고, 일본 입장에서는 65년 협정에 따라 청구권 자금을 받은 한국 정부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또 청구권 자금을 사용한 한국 기업도 정부가 2회에 걸쳐 피해자 보상을 하는 동안 수익을 올렸으므로 해결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결국 한국 정부와 한국 기업, 일본 기업 등 3자가 자금을 출연하여 보상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시효, 상속, 2회 보상 수령자의 처우 등을 고려한 전체 보상 규모를 확정하여야 한다.

일본 정부도 중국에 대한 배상 사례와 유대인·동유럽 강제 노동 사례를 고려해 ‘2+1 보상안’에 일본 기업이 참여하는걸 막지 말아야 한다. 일본 정부가 이 제안을 쉽게 받지는 않겠지만 끈질긴 교섭으로 합의를 꾀해야 한다. 일본과의 교섭 시간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현금화 진행을 막는 방안으로 포항제철이 60억원을 기부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지원재단이 제3자 공탁을 하는 잠정 조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동시에 화해치유재단 해산으로 무력화되어 한국 불신의 또 다른 근원이 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합의도 피해자 기림사업, 연구사업, 전시 성폭력 피해자 지원 등 후속 사업을 통해 합의의 당초 취지를 살려 나갈 필요가 있다.

역사 화해는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정(正)의 역사든 부(負)의 역사든 끌어안고 우리 스스로 소화해내야 성장할 수 있다. 과거를 잊거나 과거에 얽매이는 것을 모두 경계해야 한다. 불행했던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가해자가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게 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초불확실성 시대에 냉정한 대응 필요

이를 위해 역사를 기록하고, 역사의 교훈을 찾으며, 이를 후세에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시정할 한·일 근세사 연구 역량을 강화하고, 근세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본의 전후 세대에 올바른 역사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중단된 한·일 역사 공동 연구를 부활하고, 한·일 역사 교과서·부교재 편찬 사업을 추진하여야 한다. 80년이 걸린 독일-폴란드 공동 교과서처럼 긴 안목으로 꾸준히 두드려야 한다.

이와 함께 역사 이해의 지름길인 인적·문화 교류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 중장기적으로 볼 때 중요한 것은 양국 시민사회의 활발한 교류를 통한 건전한 역사의식의 함양이다. 특히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 교류야말로 대폭 강화하고 제도화하여야 한다. 일본에서도 인기가 있는 한류에 근세사가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이해를 높이는 방안도 좋을 것이다. 동시에 전쟁 전 일본과 전후 일본을 구분하여 객관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부정적 스토리만 존재하는 한·일 관계사에 긍정적 스토리도 발굴하여 소개하는 균형이 필요하다.

어려운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냉정하고 차분하게 초(超)불확실성의 전환기 국면을 잘 읽고 이를 헤쳐나갈 주변 친구와 지렛대를 만들어가야 한다. 원칙을 지키되 국익을 챙기는 탈이념적 자세로 과거사의 벽을 넘어 한·일 관계의 당면 위기를 극복해나가야 한다.

신각수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주일대사·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