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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딜 브렉시트, 조기 총선안도 패배···존슨 英총리 '굴욕의 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AFP=연합뉴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AFP=연합뉴스]

 영국 하원이 아무런 합의 없이 유럽연합(EU)을 떠나는 '노 딜'(no deal) 브렉시트를 막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이에 반발한 보리스 존슨 총리가 조기 총선 안을 의회에 냈다. 하지만 하원은 표결을 벌여 곧바로 부결시켰다. 취임 이후 처음으로 의회에서 실시된 세 차례 주요 표결에서 존슨 총리는 모두 패배하면서 궁지에 몰리고 있다. 현지 언론 등에서 '존슨 패배의 날'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노 딜 브렉시트 방지법안 하원서 의결 #상원도 장기 정회전에 처리키로 합의 #존슨 10월 조기총선 카드 냈지만 부결 #3분의 2에 턱없이 부족…연이은 좌절

영국 하원은 4일(현지시간) 밤 존슨 총리가 10월 15일 총선을 치르자고 제안한 안에 대해 표결했다. 총선을 치르려면 투표권이 있는 하원 의원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434표가 필요하다. 하지만 표결 결과 찬성 298표, 거부 56표로 동의를 구하지 못했다.

앞서 하원은 이른바 노 딜 브렉시트 저지 법안 표결에서 찬성 327표, 반대 299표로 가결했다. 이 법안은 10월 19일까지 EU와 합의하지 못하면 내년 1월 말까지 브렉시트를 3개월 더 연장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자 존슨 총리는 "의회가 브렉시트 협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이제 남은 것은 국민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0월 17일로 예정된 EU 정상회의에 자신과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 중 누가 총리로서 협상하러 갈 것인지를 국민이 결정해 달라고 했다. 이를 위해 10월 15일 총선을 치러 국민의 브렉시트에 대한 의견을 확인하자는 주장이다.

브렉시트 반대 시위대가 보리스 존슨총리의 모습을 흉내낸 채 그를 비판하고 있다. [EPA]

브렉시트 반대 시위대가 보리스 존슨총리의 모습을 흉내낸 채 그를 비판하고 있다. [EPA]

총선이 치러지려면 하원의 3분의 2가 동의해야 하므로 코빈 대표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코빈 대표는 "총선은 노 딜 브렉시트를 막는 법안을 완전히 끝내 놓은 후에 응하겠다"고 일축했다.

존슨 총리는 하원이 의사일정 결정 권한을 정부로부터 가져오는 표결을 포함해 취임 후 잇따라 하원에서 진행된 핵심 안건 표결에서 대패하면서 굴욕을 맛봐야 했다. 의회를 장기간 문을 닫게 하는 등 강수를 두다 반발을 불러왔고, 노 딜 브렉시트에 대해서는 보수당 내에서 반기를 드는 의원이 속출했다. 그런데도 자신과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의 당원 자격을 정지시키며 강수를 뒀지만 결국 패배를 겪는 처지가 됐다.

상원은 의회가 장기 정회에 들어가기 전인 금요일까지 노 딜 브렉시트 방지 법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이 법이 상원을 통과하면 브렉시트는 EU와 존슨 총리가 10월 31일 전에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한 내년 1월까지 연기될 전망이다.

 코너에 몰린 존슨 총리로서는 총선을 다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존슨 총리는 그동안 코빈 대표가 총선을 치르자고 주장해놓고 이제 와서 거부하고 있다고 비난 중이다. 존슨 총리로서는 총선을 치를 경우 노동당보다 지지율이 높기 때문에 다수당에 오를 수 있다는 계산이다. 실제 정당 지지율은 보수당이 30%대이고, 노동당은 20%대다. 단독으로 과반은 하지 못하더라도 연립정부를 꾸리면 존슨은 계속 총리직을 유지하면서 브렉시트를 자신들의 뜻대로 진행할 수 있다고 본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 [AFP=연합뉴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 [AFP=연합뉴스]

하지만 당장 노 딜 브렉시트 때문에 보수당 내에서도 21명가량이 반란표를 던졌다. 존슨 총리가 당에 쫓아낸 반란파 중에는 윈스턴 처칠의 외손자인 아서 니컬러스 윈스턴 솜스 의원이 포함됐다. 솜스 의원은 BBC에 "전 세계에서 영국의 국채가 폭락하고, 국제 현안을 둘러싸고 우리의 입지가 크게 훼손될 것이라는 점을 우려한다"고 말했다. 이들 반대파들은 '노 딜'에 대해선 수용할 수 없다는 소신파들이다. 이들 중엔 차기 총선을 불출마한 이들도 많아 반란 가담에 정치적 부담이 없었다.

 존슨에 반대하는 범야권은 노 딜 브렉시트는 안 된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다. 동시에 정치적 계산도 있다. 당장은 총선을 받지 않았지만 노동당 등은 브렉시트가 연기된 상황에서 총선을 치르는 데 동의할 가능성이 있다. 코빈 대표로서는 노동당이 단독 과반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총선에서 보수당보다 범야권이 표를 더 받으면 연립정부를 꾸려 정권을 빼앗아 올 수 있다. 야권의 연립정부에서는 코빈이 차기 총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2017년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보수당의 파워를 과신하고 조기 총선을 제안했다가 과반을 상실했다. 노동당으로선 정권 조기 탈환을 위해 총선을 피할 이유는 없는 상황이다. 다만 범야권은 존슨 총리를 믿지 못한다. 총선을 치르려면 의회를 해산해야 하는데, 정부는 유지된다. 의회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존슨이 노 딜 브렉시트를 밀어붙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당장은 총선에 응하지 않고 노 딜 방지법안을 확실히 해놓고 보자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총선이 실시되기 전이라도 존슨 총리가 무리한 수단을 계속 동원하다가는 불신임 투표에 직면해 단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존슨 스스로 반란표를 던진 의원들을 쫓아냈기 때문에 연정을 하고 있는 북아일랜드독립당을 포함하더라도 존슨 정부는 하원 과반에서 한참 모자란다. 자칫 역대 최단명 총리가 될 수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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