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그림자에게 길을 물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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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모처럼 실상사에서 잠을 잤습니다. 새벽 예불 소리에 깨어보니, 또 하루 천년의 아침입니다. 멀리 천왕봉은 흰 구름으로 세수하는 중이고, 들녘은 오리 농법의 황금빛으로 넘실넘실. 내년엔 자운영 농법으로 바꾸려는지 농장공동체 팀들이 보랏빛 꽃구름, 자운영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어젯밤엔 수월암의 연관 스님을 찾아뵈었지요. 스님은 공부시간 외에는 주로 산행을 하는데, 불가에 널리 알려진 '죽창수필''선문단련설' 등을 엮어 펴낸 바 있지요. 일평생 구름을 따르는 스님의 길, 운수납자의 길은 왠지 쓸쓸해 보입니다. 그는 좀처럼 나서지 않지만 도법.수경 스님과 더불어 생명운동의 베이스 캠프인 실상사의 삼두마차이지요.

섬진강 오백 리 길을 홀로 가는 스님에게 누군가 물었더니 "그림자와 단둘이 오붓하게 가는 중"이라 했다지요. 한산시의 한 구절 '그림자가 돌아보며 어디로? 묻는다'와 출처를 잊었지만 '내 그림자와 서로 조문을 하네'라는 절대고독의 경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대답입니다. 나도 내 그림자에게 길을 물어 어디론가 떠나고픈 날입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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