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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범벅된 엄마"···히로시마 그날, 日야구전설 장훈 가족의 기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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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일본 프로야구에서 2000안타를 달성한 재일동포 장훈 선수(왼쪽)와 어머니 박순분 씨(가운데), 작은누나 장정자 씨(오른쪽). [중앙포토]

1972년 일본 프로야구에서 2000안타를 달성한 재일동포 장훈 선수(왼쪽)와 어머니 박순분 씨(가운데), 작은누나 장정자 씨(오른쪽). [중앙포토]

“도망칠 때는 동생도 나도 아무런 얘기를 못 했습니다. 정말 무서울 때 사람은 목소리도 눈물도 나오지 않아요.”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79)의 작은 누나인 장정자(고바야시 아이코·81) 씨가 ‘히로시마 원폭의 날’을 이틀 앞둔 4일 고향 히로시마를 찾아 피폭 증언을 하며 남긴 말이다. 5일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장씨는 이날 120여 명의 젊은이 앞에서 74년 전 피폭 당일의 참혹했던 기억을 되새겼다.

작은누나 장정자, 고향 히로시마서 강연 #"어머니, 동생과 나 감싸다 온몸 피범벅 돼" # 큰누나 근로동원 나갔다가 전신화상 숨져 #조선인 수만 명 피폭…희생자 수 몰라

재일동포 야구스타 장훈의 작은누나인 장정자 씨의 피폭 증언을 다룬 마이니치신문 기사. [마이니치신문 온라인판 캡처]

재일동포 야구스타 장훈의 작은누나인 장정자 씨의 피폭 증언을 다룬 마이니치신문 기사. [마이니치신문 온라인판 캡처]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당시 7살이었던 장씨는 동생 장훈, 어머니와 함께 집에 있었다. 그의 집은 원폭 투하지점에서 2~3㎞ 정도 떨어져 있었다. 장씨는 “굉음과 함께 나온 시뻘건 섬광을 잊을 수 없다”며 “집이 충격으로 무너지는 것을 본 어머니가 우리를 감싸려다가 온몸에 유리 파편이 박혔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이후 상황을 설명했다.

“어머니가 ‘훈이를 데리고 어서 도망쳐라!’고 외쳤어요. 동생 손을 붙잡고 폭탄이 떨어진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습니다. 도중에 어머니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 피비린내가 나는 셔츠를 빨기 위해 강으로 내려갔는데, 너무 많은 시체가 떠다녀 물빛 역시 검붉은 상태였어요.”

장씨의 언니이자 장훈의 큰누나는 근로동원으로 시내에서 일하다가 봉변을 당했다. 전신에 화상을 입고 결국 숨졌다.

장씨는 가족과 만나도 그날의 아픈 기억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 한 초등학교의 요청으로 아이들에게 피폭 경험을 털어놓고서야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거주지가 있는 효고현을 중심으로 강연회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고향인 히로시마에서의 강연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동생 장훈 역시 일본에서 야구선수로 대스타가 됐지만 피폭 경험에 대해선 오랫동안 말을 아껴왔다. 환갑을 넘긴 뒤에야 큰누나를 빼앗아간 원폭에 대한 분노를 미디어를 통해 밝혀왔다. 그러나 장훈은 이날 히로시마를 찾지 않았다. 여든을 앞둔 그는 마이니치와 전화 인터뷰에서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화내는 것도 이제 지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야구해설가로 활동 중인 장훈 씨와 현역 시절 활동 모습. [중앙포토]

야구해설가로 활동 중인 장훈 씨와 현역 시절 활동 모습. [중앙포토]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에는 장씨 가족을 포함해 수만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주로 군수공장 등에서 일하던 노무자와 가족들이 집단촌을 형성하며 살았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희생됐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본이 신원확인도 하지 않은 채 피폭된 시체들을 소각하거나 매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면 재일동포와 피폭자들은 히로시마의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를 찾는다. 5일 오전에도 300여명의 추모자가 위령제를 지냈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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