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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기업·민간 “한 방 맞았지만 한국은 할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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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환영식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인사를 나눈 뒤 이동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환영식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인사를 나눈 뒤 이동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우왕좌왕→대오단결(隊伍團結)’.

[일본 경제보복 한달]

지난달 1일 일본이 경제 보복 조치를 공식화한 뒤 한 달간 대한민국 정·관계와 기업, 민간의 대응을 요약한 말이다. 지난해 기준 한국의 5위 수출국, 3위 수입국인 ‘경제 대국’ 일본에 예상치 못한 일격을 받은 뒤 혼란을 겪다 민·관이 힘을 합쳐 ‘총력전’에 뛰어들며 점차 화력을 발휘하는 모양새다. 2일 일본 각의(내각)가 화이트 리스트(백색 국가·수출 우대국)에서 한국을 배제하는 조치를 의결하면 또 다른 고비를 맞는다. ‘장기전’의 초입에 들어선 대한민국호(號 )의 한 달을 돌아봤다.

헤매다 번뜩 정신 차린 靑·정치권

일본 정부가 반도체 핵심 소재 3종의 한국 수출을 규제할 예정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건 지난 6월 30일 일본 매체의 보도를 통해서다. 공교롭게도 남ㆍ북ㆍ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회동을 한 날이었다.

사실상 일본의 ‘선전 포고’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일요일이어서 확인이 쉽지 않다” “공식 통보받은 바 없다”며 허둥지둥했다. 결국 지난달 1일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로 ‘한 방’을 얻어맞은 뒤 “깊은 유감을 표한다” 수준의 반응을 내놓는 데 그쳤다. 정부의 한 간부는 삼성ㆍSKㆍLG 등의 임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기업들은 일본에 지사도 있고 정보도 많을 텐데 사전 동향을 파악하지 못했느냐”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증폭되기도 했다.

분위기는 4일 수출 규제 조치가 본격화하자 급반전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수위도 높아졌다. “한국 기업에 실제 피해가 발생하면 필요한 조치를 하겠다(8일)”→“사태 장기화 가능성이 있다(10일)”→“일본이 우리 경제 성장을 가로막았다. 결국 일본에 더 큰 피해 갈 것이다(15일)”.

대통령 발언에 맞춰 청와대는 대일 전략을 ‘선(先) 외교 봉합, 후(後) 탈일본’으로 선회했다. 일본 대응 전략 관련 부처 회의를 수시로 열어 대응책 마련에 들어갔다. 기획재정부ㆍ산업통상자원부ㆍ중소벤처기업부를 중심으로 일본 의존적이었던 부품ㆍ소재 산업 구조의 체질 개선에 들어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당 대표 초청 대화'에 앞서 여야5당 대표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의당 심상정 대표,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문 대통령,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 [사진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당 대표 초청 대화'에 앞서 여야5당 대표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의당 심상정 대표,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문 대통령,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 [사진 청와대]

정치권 분위기도 한 달 새 급반전했다. 국정 실패를 탓하며 국회를 공전시킨 야당은 최근 국회에 복귀했다. 지난달 31일엔 5당 대표가 합의해 일본 조치에 대한 ‘초당적 협력기구’를 출범시켰다. 비록 면담은 불발에 그쳤지만 같은 날 지일파 의원으로 구성된 방일단이 일본 의회를 방문하는 등 ‘반일’을 기치로 여야가 합심하는 모양새다.

외교 총력전, 기업 기 살리기 나선 관(官)

정부의 초기 대응은 ‘굴욕’의 연속이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일본의 보복 조치가 현실화하자 부랴부랴 ‘국장급’ 양자 협의를 제안했다. 일본 측 거절로 지난달 12일 ‘과장급’ 실무협의에서 첫 양자 대면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홀대’ 논란만 불거졌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아미 베라 하원의원(코리아 코커스 공동의장)을 만나 일본 조치의 부당성 등 우리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아미 베라 하원의원(코리아 코커스 공동의장)을 만나 일본 조치의 부당성 등 우리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이후로는 전열을 가다듬은 뒤 다각도로 대응을 시작했다. 23~24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일반이사회에서 국제 사회에 일본 조치의 부당성을 환기했다. 지난 4월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와 관련한 한ㆍ일 WTO 분쟁에서 승전고를 울린 대응팀을 주축으로 세웠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을 방문해 중재를 요청하고 산업계 인사를 만나는 등 우군 확보에 들어갔다. 이런 대응의 결과 처음엔 “(한ㆍ일 무역 갈등에) 개입하지 않겠다”던 미국을 협상 판으로 끌어들였다. 미국 반도체 업계로부터 일본의 조치가 부당하다는 의견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초기에는 관망하는 듯했던 기획재정부는 추가경정예산(추경)에 일본 조치 대응 관련 예산을 긴급 추가했다. 지난달 마련한 세제 개편안에서 부품 소재 연구개발(R&D) 세액공제를 확대하는 등 ‘기업 기 살리기’에 동참했다. 환경부도 화학물질 관련 규제를 일부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정부가 정책의 방향을 미세하게나마 '친기업'쪽으로 조정하려 한다는 평가가 나왔다.

외교부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일본과 각을 세우면서 소통에 소극적이었다. 부처 내 일본통을 의도적으로 홀대하기도 했다. 일본과 외교 갈등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지난달 19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를 불러 “지극히 무례하다”며 거친 말을 쏟아낸 장면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오른쪽)이 1일(현지시간) 태국 방콕 센타라 그랜드호텔에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 양자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경화 외교부 장관(오른쪽)이 1일(현지시간) 태국 방콕 센타라 그랜드호텔에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 양자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랴부랴 수습에 나선 외교부는 대일 외교 채널을 총동원해 협의에 나서는 한편,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같은 ‘안보 카드’까지 만지작거리며 미국에 중재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뒤늦은 분투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닫힌 문을 열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다. 1일 태국 방콕에서 한ㆍ일 외교장관 회담을 갖고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지만,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자력갱생’ 뛰어든 기업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가운데)이 지난달 12일 일본 출장을 마치고 서울 김포공항으로 귀국하는 길에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가운데)이 지난달 12일 일본 출장을 마치고 서울 김포공항으로 귀국하는 길에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지난 한 달간 ‘직격탄’을 맞은 건 기업, 그중에서도 반도체 부품 소재를 수입하는 삼성전자ㆍSK하이닉스였다. 일본이 규제를 본격화한 직후 각각 이재용 부회장과 이석희 사장이 일본을 방문해 상황을 점검하고 물량 확보에 나섰다. ‘비상 경영’을 내걸고 수입선 다변화, 부품 소재 국산화 등 반도체 발(發) 탈일본 전략에 시동을 걸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수입선 다변화, 신소재 공정 테스트를 병행하며 혹시 있을지 모를 비상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며 “고객에게 서한을 보내 안심시키는 등 반도체 생산에 문제가 없다는 점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접 타격을 입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타격을 받을지 모르는 기업도 대응에 들어갔다. ‘2차 보복’이 예상되는 전기차 배터리 제조업체가 대표적이다. 일본산 배터리 분리막을 수입해 온 LG화학은 일본산 분리막 물량을 줄이고, 국산ㆍ중국산 수입 물량을 늘린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항공ㆍ아시아나항공과 저비용항공사(LCC)는 일본 노선을 줄이는 대신 중국ㆍ동남아 등으로 노선을 다변화하고 있다. 겨울 성수기를 앞둔 10월 말쯤 추가로 일본 노선 조정에 들어갈 계획이다.

‘보이콧 재팬’ 단결한 민간

지난 한 달간 인터넷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건 ‘노노재팬’이란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 사이트였다. 접속자가 폭주하면서 사이트가 마비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불매 대상도 패션ㆍ맥주ㆍ식음료부터 화장품ㆍ자동차까지 전선을 넓히고 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불매운동의 표적이 된 유니클로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0~30%가량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마트에 따르면 지난달 일본 맥주 매출은 전달 대비 62.7% 빠졌다. 시세이도나 SK-Ⅱ 같은 브랜드는 20% 줄었다. ‘일본 기업’으로 몰린 쿠팡ㆍ다이소는 “일본 기업이 아니다”고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불매운동은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국민 스스로 전개하고 갈수록 정교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한ㆍ일 양국 간 분쟁이 있을 때마다 불매운동은 있었다. 과거에 “일본 제품 사지 말자”는 식으로 뭉뚱그린 불매운동을 벌였다면 이번에는 정확한 브랜드ㆍ품목을 선별해 저격하는 식이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불매운동을 이번처럼 광범위하게, 자발적으로 전개한 것은 처음”이라며 “작은 것부터 실행해 옮기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공유해 참여를 이끌고 있다”고 분석했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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