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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있는 전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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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에스더 기자 중앙일보 팀장
이에스더 복지행정팀 기자

이에스더 복지행정팀 기자

2011년 봄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 급성호흡부전 증상을 보이는 환자 8명이 잇따라 입원했다. 이 중 7명은 20~30대 임신부였다. 이들은 기침·호흡곤란 등의 증상으로 동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상태가 악화돼 옮겨졌다. 집중 치료에도 차도가 없었다. 고윤석 교수 등 중환자실 의료진은 “신종 감염병일 수 있다”며 보건당국에 신고했다. 질병관리본부(질본)는 이튿날 역학조사관을 급파해 현장 역학조사를 시작했다.

조사 10여 일 만에 바이러스나 세균에 의한 감염병이 아니라는 게 확인됐다. 다만 원인을 알 수 없어 ‘원인 미상의 중증 폐 질환’으로 명명됐다. 현행법상 감염병이 아닌 것이 확인되면 질본은 더는 조사를 할 권한이나 의무가 없다. 하지만 질본은 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추가 조사를 계속했다. 환자들은 별다른 공통점이 없었고, 자칫 미궁에 빠질 수 있었다. 그때 환자들의 집을 일일이 찾은 역학조사관의 눈에 가습기가 들어왔다. 그해 8월, 이무송 아산병원 예방의학과 교수팀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면 원인 미상 폐 손상이 발생할 위험도가 일반인의 47.3배 높다는 역학조사 결과를 내놨다.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가 위험 요인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1421명을 숨지게 하고 수천 명에게 후유증을 안긴 가습기 살균제 비극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그 뒤에는 ‘영혼 있는’ 전문가들의 책임감과 노력이 있었다. 만약 중환자실 의료진이 신고하지 않고 무심하게 넘겼다면, 질본이 역학조사를 중단했다면, 역학조사관이 가습기를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연구팀이 가습기 살균제를 의심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보다 가습기 살균제가 세상에 나오기 전, 제품 출시에 관련된 수많은 전문가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영혼을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이에스더 복지행정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