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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청와대와 민주당, 감정을 앞세울 때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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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부 주요 인사들의 대일 대응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흐르고 있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서 비롯된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한 의견을 표시하면서다. “이 정도 경제침략 상황이면 의병을 일으켜야 할 일”(지난 7일, 최재성 일본 경제 보복 대응 특위 위원장)이란 말이 나왔을 때만 해도 해당 정치인의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 같은 생각은 여권 전체에 퍼져 가는 양상이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지난 13일 밤 1980년대의 대표적인 운동권 가요인 ‘죽창가’의 유튜브 링크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 전날 문재인 대통령은 “전남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했다. 이 내용은 원고에 없던 표현으로, 문 대통령의 ‘애드리브’였다. 또 대일 외교전의 첨병인 김현종 청와대 안보실 2차장도 “1910년 국채보상운동과 1997년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을 했던 것처럼 똘똘 뭉쳐 상황을 함께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죽창가’ 띄우고 ‘국채보상·의병’ 발언 #감정적 대응은 무한 갈등만 증폭시켜 #냉철하게 외교적 옵션 깊이 검토할 때

문 대통령의 복심으로 알려진 최 위원장의 ‘의병’ 발언에 이어 나온 ‘죽창가’ ‘12척’ ‘국채보상운동’은 모두 폭력적인 일제에 맞서 반일을 상징해 오던 단어들이다. 이번 사태의 장기화에 대비해 정신적 대비를 강조하는 측면이겠거니 이해를 하려 해도 문 대통령과 그의 핵심 참모들이 냉정하고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면에 쏠려 가는 듯한 흐름은 매우 불안하다. 이들이야말로 오히려 치밀하게 외교적 전략을 수립하고 국가적 대응을 이끌어야 할 리더들이 아니겠는가. 오죽하면 친여 성향의 정의당 김종대 의원이 조 수석의 죽창가 링크에 대해 “전략가들이 할 일은 아니지 않나. 지금은 전략가가 필요한 시기다”며 “아주 냉철하게 봐야 한다”고 지적했을까. 청와대 참모들은 요즘 사석에서 “사실상 현재 일본과 전쟁 상황”이란 언급을 한다고 한다. 대일 외교의 최전선에 있는 청와대 내부에서 ‘전쟁’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도 우려스럽다.

정부의 감정적 대응은 국민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외교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양 국민 간의 감정싸움으로 번지면 수습할 길은 요원해진다. 당장 국내에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대상 품목도 맥주와 담배에서 음료·과자 등으로 확대하고 있다.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는 15일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제품 판매 중단을 확대한다는 선포식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감정적 대응이 계속될 경우 국민들이 동요할 수 있고 더불어 일본의 반한 감정도 더욱 증폭될 수 있다. 자칫 외교적 대응은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15일 페이스북에 최근 상황을 우려하며 “DJ(김대중 대통령)는 외교 강화론자이며 늘 국익을 생각하라 했다. DJ였다면? 강제징용 문제도 이렇게 악화시키지 않았다”고 썼다. 그러면서 “국익을 생각하고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부와 여권은 더 이상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전략적 사고로 냉철한 접근을 하기 바란다. 상대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일본 정부가 응할 수 있는 외교적 옵션을 더 깊이 검토·고민해야 한다. 수백여 년 전의 역사나 대입하는 감정적인 대응은 무한 갈등만 부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