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물난리에 차 막고 … 시민 피해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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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 서울 태평로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지친 조진상씨가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최정동 기자

12일 오후 7시20분, 평소 퇴근 차량으로 가득 차던 서울 태평로의 왕복 8차로가 텅 비었다. 이날 열린 반(反)자유무역협정(FTA) 집회 때문에 오후부터 경찰이 시청 일대 교통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FTA 반대'라는 구호를 내건 시위대 차량 몇 대만 길 한가운데 주차돼 있었다.

태평로 삼성본관 앞 버스정류장엔 집에 가려는 시민 수십 명이 발을 동동 굴렀다.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는 조진상(37.고양시 마두동)씨도 이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집에 가는 9706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휴, 나 어떻게 집에 가. 정말 큰일났네." 목을 빼고 기다려도 버스가 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서울역까지 걸어갔지만 그곳은 차들이 도로에 꽉 막혀 아예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버스회사에 전화했으나 "신촌 외엔 운행하지 않는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조씨의 얼굴에 낭패감이 묻어났다.

그는 결국 지하철을 갈아타고 구파발에 가서 원당까지 버스를 탄 뒤, 다시 택시를 타야 했다. 이날은 가뜩이나 폭우와 시위 때문에 그가 담당하는 영캐주얼 매출도 반 토막 난 날이었다. 조씨는 "평소 비가 오면 매출이 줄긴 하지만 오늘은 시위까지 겹쳐 더 형편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FTA로 피해를 볼지도 모를 농민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 물난리에 꼭 이렇게 차를 막고 시위를 해야 하느냐"며 "시민들이 겪는 피해도 생각을 해 줬으면 좋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은 조씨에게 아주 긴 하루였다.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고양시에 사는 조씨에게 이날 아침 출근길은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날 오전, 평소처럼 8시10분 출근길에 나선 조씨는 20분 가까이 기다려 간신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평소엔 뻥 뚫리던 길이 꽉 막혀 버스는 꼼짝을 못했다. 조씨는 '침수 때문에 막혀 버스가 움직이지 않습니다'고 팀장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9시10분쯤 지하철을 타면 조금 빨리 갈 수 있을까 싶어 버스에서 내렸다. 하지만 백석역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하철이 안 다녀요"라고 말하며 올라왔다. "5년간 일산에 살면서 지하철이 침수된 건 처음이네." 조씨는 어이가 없었지만 다시 발길을 돌려 다음번 9706번 버스를 잡아탔다.

그가 서울시청 앞 정류장에 내린 시간은 10시20분. 평소보다 한 시간이 더 걸렸다. "개점시간(10시30분) 전에는 도착해야 하는데…." 걸음을 재촉해 직장으로 향했다. 장대비 때문에 양복은 다 젖어버렸다.

조씨는 집을 나서기 전까지 이런 난리를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그는 "어제 저녁 기상예보를 볼 때는 비가 오긴 해도 이런 집중호우가 내린다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며 "기상청이 제대로 예보만 해줬어도 일찍 나와서 이런 고생은 안 했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

"비 오는 데다 시위까지 있다니. 정말 오늘은 운이 참 없는 날입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퇴근하고도 9시30분이 돼서야 집에 도착한 조씨는 이날 하루를 마감하며 긴 한숨을 쉬었다.

12일 서울광장에 집결한 한·미 FTA 반대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로 광화문 쪽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집회를 마친 시위대가 시가행진을 벌이면서 경찰청 앞 의주로 일대가 한동안 극심한 정체현상을 빚었다. 안성식 기자

한애란 기자<aeyani@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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