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노동자가 된 의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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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재작년 7월 전공의들이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아간 일은 큰 사건이었다. 이들은 "하루 16시간 근무, 제대로 못 쓰는 출산휴가, 저임금 등은 행복추구권 침해"라며 "사람답게 살게 해 달라"고 외쳤다.

엄격한 도제(徒弟)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의사 세계에서 선배 병원장들에 대한 '반란'이었다. 일반인들은 "주 40시간제를 하는데 120시간 일하는 데가 있나"라고 의아해 했다. 남녀 구분이 없는 병원 숙직실이 알려지면서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라고 기막혀 했다.

2년이 흘렀지만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지방의 A병원. 숙소는 칸막이로 남녀 구분을 했다. 당직실에 창문도 없고 공간이 좁아 지나가기가 힘들 정도다. 눈치가 보여 연간 8일 휴가를 찾아먹기가 힘들다. 48시간 연속 근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당직비는 아예 없고 월급은 200만원 정도.

서울의 큰 병원 몇 곳을 빼면 근로환경이 A병원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올해 초 서울의 유명 대학병원 인턴들이 진료를 거부한 적도 있다. 여자 전공의가 아이 둘을 낳고 출산휴가를 가면 6개월간 수련을 더 받아야 돼 두 명은 꿈도 못 꾼다.

항상 피곤하다 보니 환자에게 집중할 수 없다. 졸면서 수술실에 들어가고 환자 배 안에 장갑을 넣은 채 꿰매기도 한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가 인턴에게 주당 각각 85시간(A그룹), 65시간(B그룹) 일하도록 해 비교했더니 A가 B보다 36% 의료 과실을 더 저질렀다. 심각한 진단 과실은 5.6배 많았다. 열악한 근로조건은 진료의 질 저하와 의료사고로 이어져 그 피해가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간다.

최근 전공의들이 노조를 만들어 의사도 노동자임을 선언했다. 목표는 주당 80시간(미국 기준) 근로, 연봉은 3600만원(지금은 2000만~2500만원)으로 잡았다. 근로시간이나 당직비 기준 등을 담은 표준 수련지침을 만드는 게 일차 목표다.

병원도 할 말이 많다. 수가(酬價)가 낮아 의료 부문의 적자를 주차장.장례식장 수입으로 메우는데 전공의 대우를 개선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전공의는 근로자이자 교육생이기 때문에 정상 임금을 줄 수 없지 않으냐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우리 사회가 의사를 보는 시각은 복합적이다. 최선정 전 보건복지부 장관 같은 이는 "저수가에도 불구하고 의료를 발전시켜 왔다"고 평가한다. 반면 '사회적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이기적인 집단'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의사는 국민건강을 지키는 공공적인 기능을 하는 전문가다. 그래서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속주민이라도 의사나 교사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시민권을 얻으면 전차경주를 공짜로 즐기고 매달 30kg의 밀을 무상으로 배급받았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외국에서는 나랏돈으로 의사 수련 비용을 댄다. 일본은 2004년 의대 졸업자에 대해 독립적인 시술에 앞서 2년간의 임상수련을 의무화하면서 그 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 미국은 메디케어(노인 의료보장제도)나 메디케이드(저소득층 의료보장제도) 등에서 부담한다.

우리나라는 흉부외과.임상병리과 등 비인기 10개 과목의 국공립병원 전공의 200명에게 월 50만원씩 국가에서 대주는 게 전부다. 민간병원이나 다른 과목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만하다. 전공의들이 관련된 수술이나 응급실 등의 수가를 조금 올리는 방안도 있다. 이런 지원엔 전제가 있다. 2000년 의약분업 파동 때 같은 진료 차질이나 수술 지연이 없어야 한다.

전공의 노조는 "생명을 볼모로 한 파업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또 윤리선언도 내놨다. 이 선언 2조에서 '환자에 대한 책임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책임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실천하지 않을 선언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귀족 노조'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신성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