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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시각각

루비콘강 건너는 한·일 경제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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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한국과 일본이 루비콘강을 건너고 있다. 일본이 그제 뽑아 든 대(對)한국 수출 규제가 양국 간에 돌이킬 수 없는 경제  분쟁을 불러올 것 같아서다. 수출규제 품목은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의 필수 소재들로, 일본이 세계 시장의 70~90%를 점유한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한국이 징용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G20(주요 20국) 정상회의까지 제대로 제시하지 않아 양국 간 신뢰 관계가 손상됐다”고 주장했다.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성 조치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일본 정부는 2000년대 들어 자국 간판 기업들이 삼성전자 한 곳을 감당하지 못해 쩔쩔매고 연쇄부도가 날 때도 이런 보복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한국 없는 셈치고 간다는 일본 #과거에 스스로 발목 묶은 한국 #진검승부 펼치는 사태는 피해야

그랬던 일본이 왜 갑자기 치졸해졌을까. 그 속내를 알아야 앞으로 장기화할 가능성이 큰 한·일 경제전쟁에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일본이 돌변한 것은 한국에 대한 기본 입장 변화에서 출발한다.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에서 ‘없는 셈 치고 가도 되는 국가’로의 전환이다. 뇌관에 불을 붙인 건 문재인 정부 들어 시작된 반일(反日) 바람이다.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은 강제징용에 대해 피해자 1인당 1억원의 배상 판결을 내리고 전범기업에 대한 자산 압류를 허용했다. 일본 정부는 반발하고 있다. 잠재적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20만명까지 거론되면서다. 일본 정부가 배상을 허용하면 잠자코 있던 중국 피해자들도 가세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란 걱정 때문이다.

결국 이 싸움은 오래갈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일본 내각은 한국에 대한 강경파가 득세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물론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까지 역대 최강경파들이다. 일본을 찾은 문 대통령과의 차가운 ‘8초 악수’가 예고했듯 아베 총리 재임 중엔 제재가 풀리기 어렵다는 얘기다. 한 달 전 도쿄에서 만난 일본의 한 유력인사는 아베의 속내를 이렇게 전했다.

“2013년 봄 아베 총리와 운동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아베 총리에게 ‘한국을 중시하라’고 했다. 아베 총리는 단칼에 반론을 폈다. ‘나는 오히려 중국을 신뢰한다. 중국은 한 번 정하면 확실히 지킨다’면서다. 아베 총리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한국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배상을 끝내기로 하고 5억 달러를 받아 경제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개별적 청구권을 요구하고 있다. 국제법을 안 지키는 나라와는 교류할 수 없다는 게 일본 정부의 분위기다. 아베 총리만의 생각이 아니다. 한국은 없는 셈 치자는 분위기다.”

아베 총리의 임기는 2021년 9월까지다. 그런데 3연임을 넘어 2024년 9월까지 4연임도 가능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2013년 시작한 ‘아베노믹스’가 성과를 거두면서 지지율은 안정적이다. 중국·러시아 등 주변국에 스트롱맨들이 장기집권하는 상황에서 아베도 롱런하는 게 좋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진짜 문제는-결은 조금 다르지만-일본인의 한국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 만난 일본 외교관의 말을 옮겨보자.

“일본은 중국에 세계 경제 2위 자리를 내주면서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 더구나 한국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삼성전자 같은 한국 기업은 세계적 기업이 됐다. 요즘 일본 젊은층은 세계를 주름잡는 한류까지 보면서 한국을 경쟁자로 본다. 과거 세대는 한·일협정 당시 한국을 도와야 할 피해자라고 봤지만, 지금은 그렇게 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일본의 보복 카드는 이런 사정들이 중첩된 결과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계기였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한·일 양국은 최악의 대치 상황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한국 정부는 적폐 청산과 함께 반일을 부채질하며 과거에 스스로 발목을 묶어 놓았다.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보는 일본은 자국 기업의 수출 감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없는 셈 치자면서 경제 전쟁의 칼을 뽑았다. 진검 승부만은 어떻든 피해야 할 일이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