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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지진 정부 후속 조치 제자리…20만 청원도 소용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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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4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 대구지법 포항지원에서 열린 '지진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지진 피해 시민들이 항의하는 뜻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포항=김정석기자

24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 대구지법 포항지원에서 열린 '지진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지진 피해 시민들이 항의하는 뜻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포항=김정석기자

24일 오후 1시 30분 경북 포항시 북구 대구지법 포항지원 앞. 느닷없이 “재판을 속히 진행하라” “정부는 석고대죄하라” “지열발전은 오라를 받아라” 등 구호가 떠들썩하게 울려 퍼졌다. 형형색색의 현수막도 등장했다. 사상 초유의 ‘지진 손해배상 소송’이 열리기 전 이 소송에 나선 시민 50여 명이 정부와 지열발전소 시행사 측에 항의의 뜻을 표시한 것이다.

지진 손배소에 1만 명 넘게 참여 #24일부터 포항지원서 재판 시작 #지열발전 지진 촉발 밝혀졌는데 #“3개월 넘도록 조치 없다” 분통

이날은 ‘포항지진범시민대책본부(이하 범대본)’가 제기한 지진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변론준비기일이었다. 변론준비기일은 판사와 소송 당사자들이 재판을 시작하기 전 청구취지나 변론방향, 쟁점 정리 등을 하는 과정이다. 통상적으로 1차 변론준비기일을 재판의 시작으로 본다. 이날 변론준비기일은 30여분 만에 끝났다.

범대본은 ‘포항지열발전소가 지진을 촉발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후부터 손해배상소송 참여인단을 모집해 왔다. 범대본의 의뢰로 소송을 진행 중인 법무법인 서울센트럴은 지난해 10월과 올해 1월, 5월 각각 세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정부와 ㈜포항지열발전, 지열발전소 운영업체 ㈜넥스지오 등을 상대로 1인당 하루 5000~1만원씩의 위자료를 요구하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차엔 71명, 2차 1156명, 3차 1만1640명이 참여해 소송인단이 총 1만2867명에 이른다. 4차 소송 참여자도 모집 중이다. 소송 참여자나 위자료 등에 따라 다르나 소송을 제기한 시민단체 측은 총 배상금액이 5조~9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원고 측 이경우 변호사는 “지진 손배소의 승소는 확실하다고 본다. 지열발전소가 지진을 촉발했다는 인과 관계가 정부조사단의 발표로 인정됐기 때문에 손해액이 얼마가 될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24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 대구지법 포항지원에서 열린 '지진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소송에 참여한 시민들이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포항=김정석기자

24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 대구지법 포항지원에서 열린 '지진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소송에 참여한 시민들이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포항=김정석기자

이처럼 전례 없는 ‘지진 손배소’가 시작됐지만, ‘지진 특별법(이하 특별법)’ 제정은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다. 여야 대립으로 국회가 파행을 거듭하고, 정부도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어서다. 특별법은 지진으로 피해를 본 주민들에 대한 구제와 심리 안정, 지진 발생 원인과 진상 규명 대책 등을 담고 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관련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가장 답답한 것은 직접적인 지진 피해를 본 당사자들이다. 지진으로 피해를 본 주택은 전파 671곳, 반파 285곳, 소파 5만4139곳 등 전체 5만5095 가구에 이른다. 시민들은 파손 정도에 따라 지원금을 받았고 거주 불가능 판정을 받은 피해자들은 임시 주택으로 이주해 생활하고 있다. 이주 대상에 오르지 못했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재민들은 여전히 흥해실내체육관에 마련된 대피소에 머무르고 있다.

24일 오전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실내체육관 내부에 마련된 대피소 모습. 이재민들이 생활하는 텐트가 줄지어 설치돼 있다. 포항=김정석기자

24일 오전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실내체육관 내부에 마련된 대피소 모습. 이재민들이 생활하는 텐트가 줄지어 설치돼 있다. 포항=김정석기자

24일 오전 찾은 포항시 북구 흥해실내체육관은 지진이 일어난 지 1년 6개월이 넘은 지금까지도 30여 명의 이재민이 텐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체육관 내부엔 221동의 텐트가 그대로 설치돼 있다. 난간에 화분이 줄지어 놓여 있거나 가재도구들이 구석에 비치돼 있는 등 오랜 기간 이재민들이 생활한 흔적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이재민 정모(80·여)씨는 “정치인들이 싸우느라 민생을 돌보지 않는 사이 이재민들은 감옥 아닌 감옥에 갇혀 하루하루 피가 마르고 있다. 정부가 지진에 책임이 있다고 밝혀진 지 3개월이나 지났는데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특별법 제정은 청와대 국민청원 20만 명 동의를 얻었음에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청원 접수 후 한 달 만에 21만2000여 명을 기록해 청와대 답변을 끌어내긴 했지만, 청와대 답변의 요지는 “국회에서 법 제정을 추진해 주면 협력하겠다”는 원론적 내용에 그쳤다. 이에 경북도와 포항시는 아쉽다는 입장을 보였고 범대본은 “시민들을 우롱하는 처사”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답답한 시민들은 산업통상자원부와 국회를 찾아가 항의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장경식 경북도의회 의장, 이강덕 포항시장도 시민들을 대신해 국회와 청와대, 정치권 지도부를 찾아가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고 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 열린 11·15지진 포항범시민대책위원회 '포항지진피해특별법 제정 촉구 집회'에서 포항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 열린 11·15지진 포항범시민대책위원회 '포항지진피해특별법 제정 촉구 집회'에서 포항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포항시 관계자는 “국민청원, 상경시위, 국회·청와대 방문 설득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지만 3개월째 성과를 얻지 못해 답답하다”며 “앞으로도 지진 피해의 심각성을 알리는 세미나와 포럼을 열어 여론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정치권에 지속적인 지원 요청을 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포항=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S박스 - '지진 촉발' 지열발전소 사후 처리는?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 있는 지열발전소가 가동을 멈춘 채 서있다. [뉴스1]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 있는 지열발전소가 가동을 멈춘 채 서있다. [뉴스1]

지진을 촉발시킨 원인으로 지목된 포항지열발전소 조성 사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송리 포항지열발전소 부지는 2017년 규모 5.4 지진이 일어난 직후 조성 공사를 멈춘 채 방치돼 있다. 60m 높이의 대형 시추기만이 이곳이 지열발전소가 조성되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정부는 포항지열발전소의 사후 처리 방안을 전문가와 시민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지난달 8일 ‘포항 지열발전 부지안전성 검토 태스크포스’(이하 TF)를 출범시키면서다. TF는 지열발전소 부지의 복구 방안, 지진 장기 모니터링 분석, 사업 부지의 향후 활용방안을 논의한다.

이강근 TF 위원장(서울대 교수)은 “국내·외 전문가와 포항지역 대표들이 6개월간의 활동을 통해 지열발전소 복구·활용 방안을 도출하고 정부에 건의할 계획”이라며 “지열발전소 인근에 심도별 배열식 지진계를 설치해 지진 여부를 장기 모니터링하고 지하수 수위·수온 등을 관찰해 시민들에게 실시간 공개하는 방식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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