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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담배냐, 전자제품이지" 단속 걸려도 대놓고 큰소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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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 앞 센트럴시티 광장에서 서초구 보건소 소속 금연구역 단속 주무관 2명이 액상형 전자담배 쥴을 흡연하는 시민을 발견해 단속하고 있다. [이승호 기자]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 앞 센트럴시티 광장에서 서초구 보건소 소속 금연구역 단속 주무관 2명이 액상형 전자담배 쥴을 흡연하는 시민을 발견해 단속하고 있다. [이승호 기자]

“선생님께선 금연구역에서 흡연하셨습니다. 국민건강증진법 제34조에 따라 과태료 부과 대상입니다. 신분증을 제시해 주세요.”
“이건 전자제품이지 담배가 아닌데요. 왜 단속하시는 거죠.”
지난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 앞 센트럴시티 광장. 이 일대 금연구역에서 흡연 단속을 하던 서초구 보건소 소속 공무원 2명과 한 남성 간에 승강이가 벌어졌다. 남성은 신종 액상형 전자담배 쥴을 피우다 적발됐다. 3일 전에 공항에서 쥴을 샀다는 남성은 “쥴은 전자기기”라고 강력히 주장하며 단속을 거부했다.

서울 서초구 보건소 금연단속 공무원 동행 취재 해보니

공무원이 보건복지부의 단속 지침 안내문을 보여주자 그제야 신분증을 내놨다. 서초구 보건소 장모 주무관은 “전자담배는 전자기기라는 주장은 현장에서 흡연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변명 중 하나”라고 말했다.

쥴·릴 베이퍼 등 신종 전자담배가 잇따라 출시되면서 보건 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궐련형 전자담배 이용이 늘어나는 가운데 미국에서 인기를 끈 쥴이 등장하면서 하락 추세인 흡연율이 올라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일선 지방자치단체는 전자담배 불법흡연 집중 단속으로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일선 단속 현장에선 법 규정을 교묘히 피해 가려 하는 전자담배 흡연자들의 행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21일 서울 서초구 보건소 금연단속반의 협조를 얻어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단속 현장을 동행 취재했다. 단속 장소는 서초구 남부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 일대다.

최근 전자담배의 성장세는 무섭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2017년 2.2%였던 궐련형 전자담배의 올해 1분기 시장점유율은 11.8%다(3월은 12.1%). 2년 새 5배 이상으로 늘었다. 단속 공무원인 김모 주무관은 “실제 현장에서 일반담배와 전자담배의 적발 비율은 5대 5로 거의 같다”며 “실제 통계보다 더 많이 피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단속현장에선 전자담배 흡연자들은 ‘전자담배는 전자제품이지 담배가 아니다’라고 가장 많이 변명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담배사업법 2조는 담배를 ‘연초(煙草) 잎을 원료의 전부 또는 일부로 해 피우거나, 빨거나, 증기로 흡입하거나, 씹거나, 냄새 맡기에 적합한 상태로 제조한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전자담배는 ‘증기로 흡입하는’ 담배에 포함된다.

정영기 복지부 건강증진과장은 “아이코스처럼 담뱃잎이 든 스틱을 전자장치에 꽂아 고열로 찌는 궐련형 전자담배나, 쥴 처럼 담뱃잎에서 추출한 니코틴 용액을 끓여 수증기를 흡입하는 액상형 전자담배 모두 담배에 속한다. 금연구역에서 단속대상”이라고 말했다. 국민건강증진법에선 금연구역에서 흡연할 경우 지방자치단체가 과태료를 최대 10만원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금연구역에선 담배를 들고만 있어도 적발될까. 불을 붙여야만 단속 대상이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만 있는 경우에는 과태료 부과 대상이 아니다. 이날 단속현장에서도 금연구역에서 일반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다가 단속 공무원이 다가오자 라이터와 담배를 황급히 주머니에 넣는 모습들이 여러 차례 목격됐다.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 앞 센트럴시티 광장에서 서초구 보건소 소속 금연구역 단속 주무관 2명이 금연구역에서 흡연을 하던 시민을 발견해 단속하고 있다. [이승호 기자]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 앞 센트럴시티 광장에서 서초구 보건소 소속 금연구역 단속 주무관 2명이 금연구역에서 흡연을 하던 시민을 발견해 단속하고 있다. [이승호 기자]

단속 공무원들은 일반 담배보다 전자담배 단속이 어렵다고 토로한다. 장 주무관은 “전자담배는 일반담배보다 연기가 잘 나지 않는다”며 “이로 인해 흡연자가 입으로 전자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뿜는 순간을 촬영해야만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흡연자들은 단속원을 보면 전자담배를 호주머니 안으로 슬그머니 집어넣는다고 한다. “스위치만 켜고 들고 있었지 피우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흡연자도 많다. 일부는 니코틴 성분이 없다며 단속원 앞에서 대놓고 흡연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21일 금연구역 흡연 단속에서 적발된 액상형 전자담배 하카. 자동차 열쇠와 모양이 비슷하다. [사진 서초구 보건소]

21일 금연구역 흡연 단속에서 적발된 액상형 전자담배 하카. 자동차 열쇠와 모양이 비슷하다. [사진 서초구 보건소]

액상형 전자담배는 생김새가 담배 같지 않아서 단속이 더 어렵다. 이날 단속반은 21일 오후 1시쯤 고속버스터미널 인근에서 액상형 전자담배를 피우던 남성 1명을 단속했다. 그가 들고 있는 전자담배는 자동차 열쇠와 모양이 흡사했다. 국산 액상형 전자담배 ‘하카’였다. 김 주무관은 “USB나 샤프심통 같은 쥴은 언론에 많이 노출돼 알고 있었지만 하카는 잘 몰랐다”며 “다행히 흡연 장면을 정확히 촬영해 단속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은 아이코스 등 궐련형 전자담배의 비중이 크지만, 쥴 역시 하루에 1건은 꼭 적발된다”고 말했다.

지난달 22일 열린 전자담배 쥴 출시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쥴 디바이스를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지난달 22일 열린 전자담배 쥴 출시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쥴 디바이스를 살펴보고 있다. [뉴스1]

흡연자 중에는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들며 사진 촬영을 한 단속 공무원들에게 강하게 항의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단속 공무원들은 흡연행위 발견 시 사진을 촬영해 증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단속에 적발된 시민은 개인정보보호를 이유로 사진 촬영을 거부할 수 없다.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르면 공공기관은 법령 등에서 정하는 업무를 위해서는 사진을 수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폭행·협박 등으로 단속을 방해하는 경우엔 현장에서 즉시 경찰에 체포될 수도 있다.

이성규 국가금연지원센터장은 “아직도 기초자치단체 중에는 예산 부족으로 금연단속 업무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곳이 있다”며 “관련 예산을 확충하고 홍보를 강화해 전자담배도 담배와 같이 단속된다는 것을 알리고, 금연구역 흡연 행위 단속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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