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토론] 이공계 기피 해법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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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 참석자

▶任敬淳 포항공대 교수.과학문화연구센터장
▶鄭奉根 교육인적자원부 인적자원정책국장
▶陳美碩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위원
▶韓民九 서울대 공대 학장
사회=都成鎭 논설위원

올해 1학기 서울대를 그만 둔 자퇴생 중 가장 많은 수는 다른 대학 의대와 한의대로 가겠다는 공대생들이어서 충격을 주고 있다. 이공계 대학원 입학시험의 정원 미달은 더 이상 뉴스가 안될 정도로 일반화돼 있다. 그동안 고도 성장의 밑거름이 됐던 이공계가 붕괴하는가. 이공계 기피 현상을 놓고 전문가들이 대책을 논의했다.

▶사회=대학에서의 이공계 기피는 어느 정도입니까. 대학교수와 연구기관 연구원 등 4백여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44%가 다시 직업을 선택한다면 의사나 판.검사를 하고 싶다고 응답했습니다.

▶한민구=이공계 문제가 언론에서 자주 거론되면서 이공계 학생들 대부분이 난파선를 타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매우 걱정입니다. 최근 서울대 공대 학생들이 의대로 가고 고시 준비에 열중하는 것은 결국 자격증을 선호하는 현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사오정(45세 정년)'에 대한 공포심이 커지면서 의사.약사 등 자격증을 딸 수 있는 직업에 몰리는 것입니다. 이런 추세가 가져올 이공계 공동화를 막기 위해 학계에서는 이공계 인력 확보 방안을 강조하고 있는데 기피 현상만 부각되고 있습니다.

▶진미석=종전에는 고교 교사의 능력을 서울대에 몇명 보냈느냐로 쟀는데 지금은 의대로 바뀌었습니다. 학생들이 원하면 의대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공계에 진학하고 싶은 학생이 부모나 담임의 강요에 따라 의대에 간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결국 학생 개인의 적성이 희생되는 셈입니다. 아무튼 이공계 기피라기보다 정확히는 의대 선호 현상이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공계 기피에만 초점이 맞춰지면 안됩니다. 돈벌이가 안되는 계열은 다 기피하는 상황이라고 해야겠지요.

▶정봉근=정부 입장에서는 이공계 우수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국가 수급 계획을 마련했는데 되레 이공계 기피 쪽으로 관심이 모아지면서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임경순=정부가 이공계 출신의 공직 진출을 확대한다고 하니까 공대생들이 한층 더 고시 공부에 몰두한다고 합니다. 공대생의 의학계 진학을 위한 자퇴보다는 졸업 후 버젓이 대기업 연구소에 취직해 연구원으로 신제품을 개발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뒤 의대.치대.한의대로 가는 실정이 더 문제입니다.

▶사회=경제성장의 주역이었던 이공계가 기피의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의대에 가면 수입이 엄청날 뿐 아니라 70세 정도까지 일할 수 있고 안정된 생활이 보장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어떻게 의대에 가는 것을 막겠습니까.

▶임=물리 토론대회에 가서 심사를 봤는데 몇몇 고교생들은 정말 물리를 좋아하고 대학에서 전공하고 싶어하더군요. 그러나 학부모들은 상 받는 것이 의대 진학에 도움되지 않을까만 생각합니다.

▶진=지금 학부모들은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때 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공계 출신이 대거 명퇴하는 것을 직접 겪었습니다. 그런데 사회 전체가 이공계 기피, 기피 하니까 내 자식이 이공계에 가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일종의 공황상태에 빠져 자녀의 의학계열 진학을 부추기는 겁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그 어떤 당근 정책을 내놓아도 의대 진학 행렬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사회=대학뿐만 아니라 실업고 황폐화와 과학고의 이공계 진학 기피도 방관해서는 안됩니다.

▶정=공대의 공동화도 대책이 필요하지만 중.고교 졸업생의 이공계 진학 회피도 심각합니다. 흔히들 이공계 고급 인력 한명이 다른 사람 1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하는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산업구조를 보면 평범한 산업대를 나와서 10, 20년 일하는 사람의 사회 기여도가 더 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산업구조가 기능공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는데도 이를 충당할 실업고 진학률은 매우 저조합니다.

▶임=실험실의 좋은 기기에는 먼지가 쌓여있고, 학생들은 좁은 방에서 대학 입학시험 준비에 몰두하는 게 과학고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동일계 대학에 진학할 경우에는 입시를 면제해 주면 과학고가 과학 영재를 육성하는 본래의 역할을 하지 않겠습니까. 또 이공계 인력 확충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회=이공계 기피 현상에도 불구하고 국가 차원에서는 이공계 인력을 적정 수준으로 끌고 가야 하지 않습니까.

▶정=양적으로는 아직까지 큰 문제가 안됩니다. 이공계가 사회.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10~20년 이후 인력이 줄어들었을 때도 지금처럼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임=포항공대의 경우 인도.베트남 등에서 오는 우수 인력이 많습니다. 국내에 남아 있는 우수 인력은 극히 부족하기 때문에 말이 안 통해도 외국 학생들을 갖다 쓰는 것입니다. 실력있는 학생들은 미국에 가는 거지요. 이러다 보니 김대중 정부 이후 과학.기술 예산이 대폭 늘어났지만 수혜자들은 외국 학생들이 되고 있어요. 과거엔 우수한 학생들이 박사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이공계 기피 현상을 막을 획기적 대책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한=학생 입장에서 보면 국가를 위해 이공계 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 본인을 위해서입니다. 국가가 이 같은 개인의 선택과 인력시장의 체계에 간섭할 수 없다면 대학에 학생 선발의 자율권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대학이 학생을 탄력적으로 뽑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무시험으로 대학에 들어올 수 있게 학생부 의무 반영이라는 규제를 풀어줘야 합니다. 전과목 성적과 수능을 준비하느라 청춘을 아깝게 보내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이공계 가고 싶은 학생들이 학생부 성적이 나빠 정말 하고 싶은 걸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매니어들을 구제할 수 있는 해법이 필요합니다.

▶진=정부가 시장문제에 개입하긴 굉장히 힘들 것입니다. 정부가 '사오정'을 해결하기 위해 민간 기업에 정년을 보장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공계 문제의 핵심은 사회에 배출된 뒤 인센티브가 없으므로 진학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보상체계를 건드리지 않고 교육만으로 문제를 풀 수는 없습니다. 소득과 조세 체계의 개선이 더 필요하지요. 의사들의 생애 소득 등을 자세하게 파악하고, 그에 따른 공평과세 조치를 강구하고, 기초과학자들의 창의성을 더욱 자극할 수 있는 보상 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임=이공계는 35세까지 고생해 박사학위 받고 10년 정도 일합니다. 인문계는 더해 40세 넘어 박사학위 받고 몇년 못 써먹습니다. 이렇게 보면 투자 대비 산출은 의대 쪽이 훨씬 높습니다. 사회적 선호도를 바꾸려면 조세 등을 통해 의대 출신의 소득 일부를 떼어 이공계에 투자하거나 이공계에 대한 보상을 늘려주는 방법 외엔 없습니다. 그런 노력 없이 아무리 이공계에 오라고 말해도 소용 없습니다. 보상체계를 갖춰놓지 못한 채 이들에게 이공계로 오라고 하는 것은 사회가 못할 짓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속이는 것이지요.

▶정=미흡하지만 국.공립대 교수들이 개발한 특허를 국가에 모두 귀속시키지 않고 보상받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기업이 대학의 커리큘럼 구성에 좀더 관여해 질적 향상을 꾀하는 새로운 산학연(産.學.硏) 모델도 검토 중입니다.

▶진=노동시장 전체 변화에 대해 준비할 수 있도록 정부도 학부모.학생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재는 대단하게 여겨지는 의사 자격증 역시 고령화 사회 속에서 인력 적체가 심해진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학부모들은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좀더 긴 호흡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봐줄 필요가 있습니다.

정리=강홍준.임미진 기자<lazymijin@joins.com>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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