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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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 위에 올라가 엎드려!』하는 호령이 들렸다. 누구 하나 반항의 소리도 없이 시체 위에 올라가 엎드린다. 우리는 벌써 네 겹으로 쌓인 시체 위에 올라가 앉은 셈이 되었다.
이미 간수 놈의 단총은 불을 뿜기 시작했다. 간수들 위치에서 보아 왼편 첫 사람부터 쏘았다. 그의 후두부를 쏘는 것이 보이는 순간, 그의 얼굴 전부가 빠져나가는 모양이 보였고, 다음 사람은 후두부가 두 쪽으로 깨지는 것이 보였다. 이것은 불과 수 삼 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글은 『한국 카톨릭, 어제와 오늘』(카톨릭 코리아간)에 소개된 한준명이라는 목사의 「증언」이다.
한 목사는 1950년 10월9일 원산 와우동 형무소 뒷산 방공호에서 인민군에 의해 김봉식 신부와 이광재 신부가 학살당하는 광경을 목격했었다.
해방이후 6·25동란 사이에 소련군과 북한군에 의해 체포, 학살당한 천주교 성직자의 수는 1백50여명을 헤아린다. 한 목사의 증언은 그 참담한 일들의 한 삽화일 뿐이다.
동란이 멎자 북의 성당들은「침묵의 교회」 「암흑의 교회」로 바뀌었다. 이와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남한의 천주교는 특히 미국의 교회와 미군의 도움으로 교회사상 보기 드문 발전을 이룩했다.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미국의 구호물자가 쌓여있지 않은 교회가 없을 정도였다. 「밀가루 교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세는 팽창했었다.
요즘 한국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평양에 파견한 문규현 신부는 판문점에서 목에 힘줄을 세우고 이렇게 외쳤다. 『이 땅을 강탈, 이 민족에게 아픔의 길로 나아가기를 강요한 미 제국주의자들은 하루 빨리 한반도에서 나가라. 문 신부는 그 말만으로 모자라 『「미제의 하수인」인 노태우 정권은 「민족의 적」』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지금 「문 신부」적 논리와 발상, 그리고 한국 카톨릭의 위상 사이에서 어리둥절한 일이 한 둘이 아니다. 문 신부 자신은 지금 「미 제국」의 영주권을 갖고「미 제국」의 메리놀 신학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북한 땅에서 문 신부가 사나운 얼굴 표정을 하고 철부지 여학생의 어깨를 끌어안고 통일을 외치며 미국을 욕하는 것은 그의 목을 감은 로만 칼러가 아무리 근엄해도 코미디 같게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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