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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뛰어넘는 작곡의 귀재 존 케이지|「주역」응용한 전위음악 각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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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주역』과 현대전위음악.
사람들에겐 마치 난센스퀴즈의 제목을 보는 듯한 엉뚱한 느낌을 줄 것이다. 도대체 두 단어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존재하는가.
그러나 여기 기상천외한 방법론과 철학으로 종종 인간의 상식에 철퇴를 가해온 작곡가 존 케이지를 개입시키면 의문의 실마리는 어렵지 않게 풀린다.
『귀재 케이지가 마침내 동양사상의 근간인 「주역」을 그의 음악에 도입했다』가 그 답이 되는 것이다.
현존 최고의 전위음악가로 평가받는 존 케이지씨가 『주역』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1946년과 47년의 2년 간에 걸쳐 콜롬비아대학에서 일본철학자 스즈키로부터 동양사상에 관한 강의를 듣고 나서부터. 스즈키의 강의를 듣고 음양이원론을 기초로 무한한 변화의 세계관을 펼쳐 가는 『주역』에 심취하게 된 그는 마침내 이를 자신의 작곡에 이용해 볼 결심을 했다.
여기서 그 방법론으로 특별히 채용된 것이 『주역』이 갖는 점복사상으로서의 우연성의 원리다.
그가 찬스 오퍼레이션(우연의 조작)이라고 이름 붙인 작곡방법은 일체의 영감이나 의도가 배제된 아주 독특한 것이다. 음표의 선택이라든가 연주될 악기의 종류가 철저히 점술에 의해 결정된다.
『처음에는 대오리를 쓰다가 다음에는 동전 3개를 던지는 방법으로 바꿨고 이제는 「주역」의 데이터를 프로그래밍 한 컴퓨터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역」에 묻고 찬스 오퍼레이션에 의해 그 답을 얻는 것입니다. 나는 자기집착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찬스 오퍼레이션을 사용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목적의식을 배제하고 어떤 의도를 지닌 「유심」이 아니라 철저한 「무심」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이 그의 음악의 목적이다.
케이지가 『주역』의 방법론을 도입한 첫 창작오페라를 선보인 것은 87년의 일. 프랑크푸르트국립오페라단의 위촉을 받아 작곡된 『유로페라스 1과 2』란 이 오페라는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초연을 거쳐 작년 7월에는 미국에서도 공연을 가짐으로써 크게 화제를 불러모았었다.
이 오페라의 각 파트에 쓰인 악기의 종류라든가, 의상·소도구 등이 모두 찬스 오페레이션에 의해 선택되었음은 물론이다.
재미있는 것은 케이지가 『주역』의 방법론을 작곡이 아닌 강연에까지 적용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가 『강연은 음악작품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고 믿고있는 만큼 그것이 그렇게 동떨어진 발상은 아니다.
그는 작년 10월부터 금년 4월까지 하버드대학에서 6차례에 걸쳐 강연을 했다. 이 일련의 강연을 준비하면서 그는 도로·에머슨·조이스·비트겐슈타인 등 작가·사상가들의 저작에서 빌어온 인용문, 혹은 뉴욕타임스·월스트리트저널 등의 신문기사들을 『주역』의 프로그램을 사용, 세분화하고 이들을 뒤섞어 컴퓨터에 입력시키는 방법을 썼다.
내용이 재미없었던지 마지막 강연 때는 청중의 3분의 1이상이 자리를 뜨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케이지는 이에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이 강연은 흥미 없는 사물에 대해 어째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를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점잖게 일갈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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