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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정말 ‘숙청’이 벌어졌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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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일부 매체가 최근 북한 김혁철 대미 특별대표가 처형당하고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이 강제노역형을 받았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확인 중’이라는 답변만 내놓았다. 북한 노동신문에 등장한 ‘앞에서는 수령을 받드는 척하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딴 꿈을 꾸는 동상이몽은 수령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반당적·반혁명적 행위’라는 문구는 최근에 고위 간부 숙청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김영철 부위원장이 최근 공식 석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으나, 필자는 북한에서 실제로 숙청 작업이 진행됐다고 본다.

정권 내부 권력투쟁 결과일 경우 #당분간 북·미 협상 진전은 없을 것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김정은 위원장이 좌절감과 분노, 당혹감에 휩싸여 북한으로 귀국하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지난해 6월에 진행됐던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국제적으로 눈부신 조명을 받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친분까지 쌓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 미국 대통령들이 골몰했던 북한의 공포정치, 인권 말살과 같은 문제들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고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약속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 후에도 미국 대통령의 “김 위원장과 사랑에 빠졌다”는 발언, 존 볼턴 보좌관에 대한 비난, 북한과 비건 특별대표와의 협상을 고집하지 않는 태도에 근거해, 김 위원장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는 확신을 한층 굳혔을 것이다.

그러나 협상은 성사되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바뀐 태도에 당황했다. 숙청 보도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해 볼 수 있다.

시나리오 1: 북한이 다시 강경 노선으로 선회한다. 주요 인사들의 숙청 뉴스가 보도되기 전에도 북한은 이미 강경 노선으로 선회하는 듯한 조짐을 보였다. 5월 9일 평북 구성에서 실시된 중거리 미사일 실험은 엄연히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다. 북한은 핵전력을 확장하면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을 위한 구실을 찾으려 할지도 모른다.

시나리오 2: 김정은 위원장은 단순히 희생양이 필요했을 수 있다. 김 위원장은 하노이에서 협상이 결렬되자 크게 당혹했고, 누군가는 이에 대한 비난을 감당해야 했다. 비건 특별대표의 상대인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숙청을 면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노동신문은 앞서 언급한 사설에서 북한 내 반혁명분자를 비난한 직후 볼턴 보좌관을 비롯한 트럼프 대통령의 참모들을 거세게 비난했다. 이는 김 위원장이 미 대통령의 참모들을 비난함으로써 회담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제3의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할 가능성을 시사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이 가정이 맞는다면 숙청 이후에는 양국의 외교가 원래의 궤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시나리오 3: 이번 숙청은 내부 권력 다툼일 수 있다. 김영철 부위원장이 외교적 실패에 연루되면서 그의 경쟁자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었을 공산이 크다.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의 최고지도자이지만 사실 김 위원장의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숙청과 처형은 군·정보기관 고위직 간부들의 권력 집중과 이들에 대한 경쟁 세력의 질투로 촉발된 조치일 수 있다. 북한은 주민들이 이웃이나 동료의 반역 행위를 고발하는 방식을 통해 주민들을 탄압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북한 이탈주민 가운데 상당수는 경쟁자의 고발로 반동분자로 몰려 탈출한 사람들이다. 김영철 부위원장이 이러한 음모의 희생자라면 북·미 관계의 장래는 암담하다. 북한은 내부 문제에 집중하고 북한 외교관들은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이 세 시나리오가 서로 상충적인 것은 아니다. 셋 다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국과 미국 정부가 상황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