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귀찮게 이런 걸 왜 하냐" 공무원 간부들의 '성교육 분탕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옛 경찰대학교 전경.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 없습니다. [중앙포토]

옛 경찰대학교 전경.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 없습니다. [중앙포토]

지난달 29일 충남 아산 경찰대 치안정책과정 강의실에서 성 평등 교육이 이뤄졌다. 성 평등 과목은 올 1월부터 24주 과정으로 시작한 치안정책과정의 5월 마지막 주 교육내용 중 하나였다.

이날 강의실에는 총경 승진 예정자와 일반부처 서기관(4급) 등 71명이 모였다. 경찰의 꽃으로 불리는 총경은 일선 경찰서의 서장급 간부다. 이번 과정 수강생의 절반 이상을 차치했다. 서기관은 서울·경기 같은 광역지자체의 과장급이다.

"피곤한데 귀찮다. 일찍 끝내라"

이처럼 공공기관의 간부를 대상으로 한 교육이었지만 곧 사달이 났다고 한다. 이날 강사로는 국내 여성학 연구자인 권수현 박사가 나섰다. 그는 강의 초반 관리자로서 성 평등 조직을 만들기 위해 가진 고민이 무엇인지 조별로 공유하도록 안내했다.

하지만 이때 누군가 뒤에서 큰소리로 “피곤한데 귀찮게 토론시키지 말고 그냥 강의하고 일찍 끝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 박사는 이 교육생을 국민건강보험공단의 한 기관장 승진예정자로 기억하고 있다.

[사진 경찰대 홈페이지]

[사진 경찰대 홈페이지]

커피 마시러 자리도 비워 

그는 무시하고 조별 토론을 진행하자마자 순간 15명 이상이 자리를 비웠다. “귀찮게 이런 거 왜 하냐” “졸리다”는 불평이 곳곳에서 나왔다. 커피를 마시겠다며 자리를 비운 간부도 있었다. 강의장을 벗어나지 않은 교육생도 토론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고 한다.

그나마 ‘여경 인사’와 관련한 질문이 이어져 권 박사는 경찰채용 기준, 직무배치, 평가의 공정성 부문을 다루기 시작했다. ‘2017년 현재 경찰 조직 내 여성 비율이 11.1%’라는 자료 화면을 띄우자 “여자가 일을 잘하면 구태여 남녀 가려서 뽑을 일이 있겠냐” 등의 반응이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강의는 중단됐다.

[사진 페이스북캡처]

[사진 페이스북캡처]

수강태도 '분탕질' 표현 써가며 비판 

권 박사는 이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A4용지 3장이 넘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이날 교육생의 수강 태도를 ‘분탕질’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비판했다. 권 박사의 페이스북 글에 따르면 당시 교육생을 지켜본 조교는 ‘마치 유치원생 같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먼 길 달려온 외부 전문가에게 노골적으로 밑바닥을 드러냈다”며 “(교육생들은) 모두 시종일관 ‘성 평등한 조직 만들기’라는 관리자에게 주어진 과업을 부정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치안정책과정의 일은 도저히 용납돼서는 안 된다”며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성 평등의 가치, 공직 사회의 기강 등을 무너뜨린 일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경찰청, "사안 확인한 뒤 재발방지" 

민갑룡 경찰청장은 3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에서 열린 출입기자 정례간담회에서 권 박사의 주장에 대해 “강연한 분의 입장에서 보면 무례한 수강자들의 행동이 있었던 것 같다”며 “사안을 확인한 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경찰대 관계자도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 박사는 오는 25일 경찰청 지휘부가 참석하는 ‘성 평등 감수성 향상 교육’에도 강사로 나설 계획으로 알려졌다.

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