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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정상은 종착점이 아니라 반환점입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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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8호 29면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도 인파로 붐비고 있다. 더 높이 오르고, 더 멀리 가보려는 인간의 도전정신 혹은 욕망이 그 정점을 찍는 듯하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갈매기의 꿈’은 근대화의 성과에 도취한 20세기 인류의 꿈이기도 했다. 최근 뉴욕타임스 1면(한국판 5월 28일 자) 사진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8848m 산정을 일렬로 촘촘히 늘어서서 올라가는 사람들. 알록달록한 등산복 행렬이 백색의 눈빛에 도드라져 보인다. 2000년대 이후의 ‘에베레스트 병목’인데, 기후가 비교적 괜찮은 봄철인 3~5월에 심하다고 한다.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도 비용을 지불하면 등반을 도와주는 여행업체가 생겼고, 네팔 정부가 입산 제한을 완화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에베레스트 정상 병목현상 상징적 #‘더 높이, 더 멀리’ 인류의 꿈 실현 #그러나 내려오는 것도 산행의 과정 #정상은 끝이라는 생각이 행복 방해

유튜브에는 이미 에베레스트 산정에 오르는 과정을 자기 스마트폰으로 생중계하는 이들까지 있다. 그 이면에는 사망자가 속출하는 비보가 전해진다. 그 높은 곳에 올라가 통행이 지체되면서 숨쉬기가 힘들어 죽어가는 사람들. 전쟁터도 아닌데 시체를 넘고 넘어 전진해야 하는 일도 벌어진다.

인간의 도전정신과 용기가 우선 놀라울 뿐이다. 창의적 도전정신이 없다면 인류 문명은 지금처럼 고도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생활의 편리함은 그 덕분이다. 도전정신은 젊음의 상징과도 같다. 그러나 도전정신이 이뤄낸 성취 뒤에는 무한적 욕망의 부작용이 따른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의 끝은 죽음이다. 도전정신의 창의성과 욕망의 무한성 사이를 적절히 조율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에베레스트는 네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에베레스트가 있다. 나의 꿈, 인생 목표가 성취되는 날이다. 수험생이나 취준생은 합격의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처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에게 그날은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날이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 가요 ‘그날이 오면’은 민주화가 되는 날을 되새겼다. 그럼 오늘 이 시대의 에베레스트는 무엇일까. 경제적 양극화와 계급갈등의 해결인가, 남북통일인가, 아니면 흔들리는 경제를 회복하는 일인가. 필자는 행복이라 말하고 싶다. 양극화 해소와 통일과 경제성장과 시험 합격 등이 모두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 아닌가. 행복이 에베레스트라면 양극화 해소나 남북통일이나 경제성장은 그리로 가는 다양한 코스일 수 있다.

여러 갈래 길이 놓여 있다. 우선순위를 말할 수는 있어도 한 갈래 길만 옳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지나친 욕심으로 속도를 낼 것도 없겠다. 때로는 돌아가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음은 살면서 누구나 경험하게 된다. 내 길만 옳다는 집착이 행복을 가로막는다.

방송을 통해 접한 남선우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장의 충고가 이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해 여기에 옮겨 놓는다. 정상은 종착점이 아니라 반환점이라고 했다. 올라갈 때 60%의 에너지를 쓴다면 내려갈 길에 40%의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내려오는 것도 분명히 산행이라는 그의 지적은 울림이 크다. 그런 점에서 등산이란 말은 산행의 모든 과정을 포괄하는 용어가 아니다. 올라갈 줄만 알고 내려올 줄은 잘 모르는 게 행복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요인인 듯하다.

정상이 끝이 아니라 계속되는 삶의 일부라는 생각이 필요할 것 같다. 경제성장 한 번 했다고 더는 경제성장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민주화라는 에베레스트도 마찬가지다.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양극화도 마찬가지며, 통일이 된다 해도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통일의 노력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영화감독 봉준호가 칸영화제라는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만 12세부터 꿔온 꿈이라고 한다. 개봉일을 기다려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을 보니 봉 감독도 행복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보아 정상에 오르기 위한 작품을 만드는 데 공을 들였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정상에 올랐으니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베레스트 이후’를 연출해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 보고 싶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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