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황무지」서 양계업으로 첫발 백만평 기업 농 일궜다|브라질이민 성공한 김정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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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비행기를 1시간30분 가량 타고 서쪽으로 5백60㎞ 떨어진 론드리나를 찾았다.
영국 런던에서 도시 이름을 따왔다는 론드리나는 브라질이 내륙개발을 위해 세운 계획도시.
한반도의 38·7배에 달하는 거대한 대륙 브라질은 국토의 상당부분이 전인미답의 밀림으로 뒤덮여 있어 브라질정부는 이들 지역의 개발을 위해 내륙 군데군데에 론드리나와 같은 전진기지 성격의 계획도시를 계속 세워나가고 있다.
계획도시에 이주민을 모으고 인근지역 밀림에 불을 놓아 이 일대를 농지나 초지로 바꿔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브라질의 개발 정책, 특히 아마존강 유역의 개발을 놓고 생태계 파괴와 세계 기상조건을 변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미국이 강력한 반대를 하고 있지만 개발을 통해 강대부국으로 발돋움하려는 브라질의 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인 상태다.
취재팀은 론드리나에서 다시 자동차를 타고 서쪽으로 계속 달려갔다.
2차선도로 양쪽에는 얕은 구릉의 초지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밀림을 태워 엄청난 규모의 초지 및 농지를 개간해놓은 것으로 지금도 서쪽의 파라과이 국경 마투그로수주를 향해 개간은 계속되고 있다 한다.
웬만한 농장이나 목장은 1천만평 규모로 브라질은 그만큼 어마어마한 모습이었다.
취재팀의 방문 목적지인 산타마리아농장은 론드리나에서 1백80㎞ 떨어진,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었다.
이곳에 교포 김정한씨(49)가 경영하는 50만평 규모의 양잠농장이 있다.
61년 우리나라에 이민법이 만들어진 이후 28년동안 4백80여가구가 이곳으로 농업이민을 왔고 공식·비공식으로 이주, 정착한 교포가 현재 5만명을 넘어섰지만 90%이상이 상파울루 등 대도시에서 의류 업에 종사하고 있고 농업 인구는 4가구에 불과한 실정이다.

<4백8O가구 이주>
그나마 기업농은 김씨 한사람 뿐으로 그만큼 그는 교포사회에서도 희귀한 존재였다.
황토 흙을 밟고 농장 안에 들어서니 사람 키보다 큰 뽕나무가 즐비하게 심어져 있고 인부 3∼4명이 뽕나무를 줄기째 잘라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뽕잎을 일일이 따지만 이곳에서는 아예 줄기까지 갈라 누에에 먹인다. 일손이 모자라는 탓도 있지만 기후와 토양이 워낙 좋아 이렇게 하고서도 1년에 9번 누에를 칠 수 있다. 1년에 2번 누에를 치는 우리나라에 비해 5배 이상의 생산량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씨는 우리나라 브라질 이민사의 애환을 모두 겪어온 산증인이었다.
65년 4월 가톨릭 교단의 주선으로 69가구 7백15명과 함께 이민선 치차렌카호를 타고 브라질에 도착한 그는 이곳 농장에서 멀지 않은 파나나주 치바치 지역에 정착했다.
일행과 함께 집단 농장을 형성한 그는 양계업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전기도 없고, 물도 제대로 없는 황무지와 같은 지역에서 전혀 익숙하지 못한 일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1년간의 악전고투 끝에 전 재산과 땅을 버리고 결국 다른 일행과 마찬가지로 대도시 상파울루로 흘러나왔다.

<뽕 줄기까지 먹여>
무일푼으로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3일장·5일장과 같은 페라(요일장)에서 행상을 하고 약간의 돈을 모아 담배 가게를 차렸다.
이때 교포사회에 새로운 일거리로 등장한 것이 자봉틀 돌리는 일이었다.
전 가족이 일본인 봉제공장에 들어가 자봉틀 돌리는 일을 한달 간 배운 뒤 담배 가게를 처분한 돈으로 가정용 자봉틀을 빌려 봉제를 시작했다.
1년쯤 하니까 식생활은 해결할 수 있었으나 무릎이 저려오는 등 건강이 말이 아닌 상태에다 장래에 대한 희망마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시계·옷 등을 도매상에서 떼어 시골에다 파는 행상을 시작했다.
상파울루에서 비포장도로를 타고 1천㎞나 떨어진 곳도 다녀야하는 고달픈 생활이었지만 이윤이 많이 남아 2년만에 식품가게를 차릴 수 있었고 여기서 다시 돈을 모아 공업용 자봉틀 5대를 구비한 봉제공장을 인수할 수 있었다.

<부동산업도 손대>
브라질 상인으로부터 실·원단을 떼어다 봉제한 뒤 다시 넘기는 하청생산으로 상품 대금을 90일짜리 어음으로 지불할 수 있는 브라질 신용제도 덕분에 꽤나 번창할 수 있었다.
75년 드디어 1백20평 규모의 2층 공장을 사들여 여성용 블라우스·니트·치마 등 의류를 자체 생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공장 일을 가족들에게 맡기고 부동산업에 뛰어 들었다. 브라질은 고졸정도의 학력이면 부동산거래 면허증을 받을 수 있었다.
브라질은 거대한 대륙이지만 꼭 필요로 하는 땅은 어차피 모자라게 마련이었다.
그러던 중 론드리나 부근에 50만평규모의 코피농장이 나왔다. 그는 이 땅을 30만 달러에 사들였다. 80년 11월의 일이었다. 봉제공장에서 번 돈으로 본래의 이민 목적인 농업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브라질에서 코피농장을 차지한 최초의 교포가 되어 이듬해 처 수확에서 60㎏들이 1천부대의 코피 원두를 생산, 7만 달러의 순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가 양잠농장을 구입한 것은 작년 초의 일이다. 산타마리아농장 이외에도 같은 규모의 사오 로렌소농장을 동시에 구입했다.
우리나라를 비롯, 중국·일본 등 아시아국가의 생사 생산량이 해마다 줄고 있는 반면 브라질은 급격히 늘고있는데 착안한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의 농업이민정책은 크게 잘 못되었습니다. 부정확한 정보, 현지공관의 한건주의식 발상, 여기에 무조건 외국에 나가기 위해 아무런 경험 없이 농업이민의 길을 택하는 등 그릇된 방향으로 가버렸습니다. 게다가 쌀·고추·채소·양계 등 재래식 농업으론 남미에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경제규모가 다른 남미에서 한국식 발상의 영농은 백전백패로 이곳 특성에 맞는 기업농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거대한 밀림의 개간으로 지금도 청년기 생명체처럼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브라질에서 김씨의 경우 농업이민의 효율적 추진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실례로 보여주고 있었다.

< 글 한종범 기자 사진 조용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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