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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정치인과 다른 이경미와 무라지의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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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도쿄총국장

서승욱 도쿄총국장

시즈오카현립대에서 곧바로 달려왔다는 ‘지한파 교수’ 오쿠조노 히데키(奧園秀樹)는 이렇게 말했다. “기타의 작은 소리가 피아노 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늘 무라지의 소리를 듣고 표정을 보며 연주한다는 피아니스트 이경미의 말에 큰 감동을 받아 찾아왔다. 그런 배려가 한·일 관계에도 필요할 듯싶다.” 가족, 지인들과 총출동했다는 60대 재일 사업가 최갑태도 기대감을 표시했다. “한·일관계가 어려우면 일본내 한인들이 직격탄을 맞는다. 쉽지는 않겠지만 두 사람의 우정처럼 양국 관계에도 실마리가 생기면 좋겠다.”

부임한 지 일주일 된 남관표 주일한국대사도,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물밑에서 움직여온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 전 주한일본대사의 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16일 저녁 7시 도쿄의 하마리큐아사히(浜離宮朝日)홀, 피아니스트 이경미(57·경남대 교수)와 일본 기타리스트 무라지 가오리(村治佳織·41)의 ‘우정 콘서트’는 이런 관객들의 간절한 바람 속에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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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일본인 작곡가 오시마 미치루(大島ミチル)가 두 사람을 위해 썼다는 곡 ‘당신의 눈동자’로 시작됐다. 연주자 두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에게 집중했다. 자신의 피아노 소리보다 무라지의 기타 소리에 더 귀를 연다는 이경미의 말 그대로였다. 커튼콜과 앙코르 공연이 이어지며 2시간 만에 막이 내린 뒤에도 관객들은 좀처럼 공연장을 떠나지 못하고 여운을 음미했다. 두 사람은 25년 전 음악축제가 열렸던 이탈리아의 길거리에서 처음 만났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2009년과 2012년 3년 간격으로 두 사람을 찾아온 암과 함께 맞서 싸웠다. 아픔 속에서 더 공고해진 자신들의 우정처럼 한·일관계 역시 ‘최악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더 단단해지기를 두 사람은 바란다. 11월로 예정됐던 콘서트를 반년이나 앞당기게 된 것도 “냉각된 양국 관계를 녹이는데 작은 힘을 보태야겠다”는 다짐에서였다.

콘서트가 끝난 뒤 출연한 NHK의 특집 프로그램에서 무라지는 “한 번의 콘서트가 큰 흐름을 만들 수 없을지 모르지만, 서로 신뢰를 갖고 양보하면 (한·일관계도)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경미도 “(콘서트를 감상하는) 관객들의 분위기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에너지를 느꼈다. 양국의 우정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서로 상대방이 한·일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삿대질을 해대고 있다. “너의 소리를 먼저 듣겠다”는 이경미와 무라지의 얼굴은 그들과는 참 달라 보였다.

서승욱 도쿄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