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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1조 성금 역풍…“기업 자선 포장해 감세 챙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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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화마에 스러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을 복원하기 위한 성금이 이틀 만에 1조원을 돌파하는 등 프랑스 안팎에서 온정이 밀려들고 있다. 그런데 대기업 중심의 거액 성금 경쟁과 이를 둘러싼 세액 공제 논란도 함께 달아오르고 있다.

전 문화장관 “90% 세액 공제” 제안 #거액 낸 업체와 친분 논란에 철회 #노란조끼 빈부격차 항의와 맞물려 #국가통합 나서려던 마크롱 곤혹

발단은 장-자크 아야공 전 문화부 장관이 화재 다음날인 16일 트위터를 통해 “노트르담 재건을 위한 기부엔 특별히 세액 90%를 감면해 줄 것을 의회에 제안한다”고 쓰면서다. 자크 시라크 정부 장관 시절 그가 발의한 이른바 ‘2003 아야공법’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는 소실 위기에 처한 문화재를 국가 보물로 지정하고 이 재건에 드는 기부에 90% 세금 감면을 할 수 있다. 프랑스는 일반 기부금의 경우 소득 20% 한도에서 기업 60%, 개인 66%의 세액 공제 혜택이 있다.

화재 이틀이 지난 17일(현지시간) 공중에서 촬영한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 첨탑과 목재 구조물로 이뤄졌던 지붕의 상당 부분이 마치 폭격을 맞은 듯 훼손됐다. [AP=연합뉴스]

화재 이틀이 지난 17일(현지시간) 공중에서 촬영한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 첨탑과 목재 구조물로 이뤄졌던 지붕의 상당 부분이 마치 폭격을 맞은 듯 훼손됐다. [AP=연합뉴스]

앞서 구찌와 이브생로랑 등을 거느린 케링그룹의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은 노트르담 복원을 위해 1억 유로(약 1280억원)를 내놓겠다고 밝혔다. 경쟁사인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그룹은 그 두배인 2억 유로를 쾌척하기로 하는 등 대기업의 기부 레이스가 불붙었다.

문제는 아야공 전 장관이 케링그룹 피노 회장 부친의 개인 고문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과는 미술품 컬렉션에 조언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들 대기업이 국가적 비극을 틈타 이미지 세탁과 세금 회피를 노린다는 비판이 나온다고 뉴욕타임스(NYT)가 16일 보도했다. 공영 라디오방송 프랑스-인테르에 출연한 정치평론가 피에르 하스키는 “(기업의) 자선이 금전적 이득으로 돌아가는 데 대한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다”고 전했다. 극좌 계열 정당 ‘라 프랑스 앵수미즈(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소속의 마농 오브리도 “기부명단이 마치 조세 회피처에 있는 기업과 개인 명단처럼 보인다”면서 “세금이나 잘 내라. 그게 나라의 문화 자산을 풍부하게 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현재 공제 혜택도 정부 예산에 부담을 준다는 지적도 나왔다. 영국 더타임스에 따르면 보수계 공화당 소속의 질 카레즈 의원은 "만약 (기업들의) 기부액이 7억 유로라면 (60% 세액 공제를 통해) 2020년 예산에서 4억2000만 유로가 비게 된다"고 주장했다.

역풍이 거세지자 아야공 전 장관은 17일 라디오 방송에 나와 자신의 제안을 철회했다. 피노 일가 역시 ‘자선 기부에 대해 어떤 세금 감면도 추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아르노 회장 측도 18일 같은 입장의 성명을 발표했다.

기업 성금에 대한 세액 공제가 쟁점이 된 것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곤란에 빠뜨린 ‘노란 조끼’ 시위와도 관련 있다. 정부의 급격한 유류세 인상에 대한 반발로 지난해 11월 시작된 노란 조끼 시위는 폭력까지 동원하며 장기화돼 결국 마크롱 정부의 ‘백기’를 이끌어 냈다. 시위대는 마크롱 취임 이후 경제 활성화를 위해 부유세 인하 등 ‘부자 감세'가 시행됐지만 중산·서민층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고 주장했다.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다음날인 16일(현지시간) 엘리제궁에서 대국민연설을 하고 있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그는 연설에서 "5년 내 더 아름답게 복원하겠다"고 공언했다. [AP=연합뉴스]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다음날인 16일(현지시간) 엘리제궁에서 대국민연설을 하고 있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그는 연설에서 "5년 내 더 아름답게 복원하겠다"고 공언했다. [AP=연합뉴스]

강성 노조로 불리는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의 필립 마르티네즈 위원장은 NYT에 “(기업들이) 한번에 1억, 2억 유로를 내놓는 것은 이 나라의 불평등을 여실히 보여준다”면서 “더는 불평등 해소를 위해 지불할 돈이 없다는 말은 해선 안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트르담 복원을 국가적 단합의 계기로 삼으려 했던 마크롱 정부는 때아닌 세금 논란에 곤혹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프랑크 리스터 문화장관은 16일 공영 라디오에 나와 “법에 따라 기업과 개인에 대한 세금 감면이 이뤄지고 있다”면서 “정부는 노트르담 재건에 애국자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도 “저소득층과 부유층 모두가 우리 역사의 중심인 대성당 재건에 동참하는 걸 기뻐해야 한다”면서 개인 기부자에 대해서도 1000유로(약 128만원)까지 세액 공제율을 75%로 올리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노트르담 화재가 드러낸 프랑스의 분열은 이뿐이 아니다. 일부 극우 인종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소셜미디어에선 대성당 화재가 기독교 가치의 타락을 드러내는 것이자 프랑스가 무슬림에 대한 관용을 베푼 대가라는 선동과 유언비어가 나오고 있다.

파리 올림픽이 열리는 2024년까지 노트르담 복원을 마치겠다고 공언한 마크롱 대통령으로선 갈라진 프랑스를 통합하는 리더십도 요구받게 됐다. 한편 프랑스는 군참모총장 출신의 장-루이 조르젤랭(70)을 노트르담 성당 복원 책임자로 임명하고 본격적인 재건 조사에 나선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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