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설] 산불 재난에 ‘뒷북 특보’, 공영방송 맞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30호 30면

대규모 산불이 발생한 강원도 고성군과 속초·강릉·동해시, 인제군 일원에 어제 국가재난사태가 선포됐다. 지난 4~5일 4000여명이 긴급 대피할 정도로 위급했다. 특히 식목일에 산림 525만㎡가 불탔다. 가뜩이나 태양광 발전한다고 최근 3년간 나무 232만 그루가 잘려나갔는데 이번 산불로 여의도 면적(290만㎡)보다 넓고, 축구장(7140㎡) 735개에 맞먹는 산림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큰불은 일단 껐지만, 정부와 재난 당국, 지상파 방송사들의 늑장 대응을 지켜본 국민은 여전히 불안하다.

4000명 긴급 대피령 와중에도 #재난주관방송 KBS는 늑장 특보 #청와대와 정부 재난 대응도 미흡

지난 4일 오후 7시 17분쯤 처음 산불이 발생하자 소방청은 당일 오후 9시 44분을 기해 강원도 화재 대응 수준을 2단계에서 최고 수준인 3단계로 올렸다. 화재 대응 1단계는 국지적 사태, 2단계는 시·도 경계를 넘는 범위, 3단계는 전국적 수준일 때 발령한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재난주관방송을 자임하는 KBS는 이른바 공영방송의 직무유기를 여실히 드러냈다. 소방청의 화재 대응 3단계 격상 이후 산불이 속초 시내를 위협하면서 주민 대피령이 내려졌는데도 재난주관방송사는 그야말로 ‘한가’했다. 검붉은 화마(火魔)가 도시와 마을을 공격한 지 한참이 지난 오후 10시 53분에야 첫 특보를 뒤늦게 내보냈는데, 그마저도 오후 11시 5분에 중단하고 정규 방송인 ‘오늘 밤 김제동’을 강행했다. 국민 생명이 위급한 전국적 재난 상황에서 정권홍보 방송이란 비판을 받아온 프로그램을 굳이 방송한 이유를 KBS는 해명해야 한다.

방송사들이 무책임한 행태를 보이는 동안 산불 피해 주민들은 시뻘건 화재 현장을 담은 동영상을 SNS를 통해 관계 당국과 방송국에 제보했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진짜 무서워요. 살려주세요”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KBS의 특보는 부실했고 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조차 내보내지 않아 장애인단체의 반발을 샀다. 공중파 MBC·SBS도 연예·오락프로그램을 틀다 뒷북 특보를 편성하긴 마찬가지였다.

정부의 대응도 미흡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5일 0시 20분에 국가위기관리센터를 방문했다. 대통령은 “가용 자원을 모두 동원해 총력 대응하라”면서 “더 이상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자정을 넘은 시간에서야 ‘선제적 대응’을 주문한 것이다.

국가안보실 총책임자인 정의용 실장은 미덥지 못했다. 그는 이날 오후 3시 30분에 시작된 청와대의 국회 운영위 업무보고에 참석 중이었다. 오후 7시 45분 정회한 뒤 오후 9시 20분에 재개됐다. 하지만 국회를 떠난 10시 38분까지 정 실장은 다급한 산불 상황을 국회의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하지도 않았다. 국가안보실 책임자를 붙들어둔 야당 의원들의 질문 공세도 문제지만, 위기대응 책임자인 정 실장의 모습에선 강원도 주민이 느낀 생존의 절박감을 볼 수 없었다. 정 실장은 오후 11시가 한참 넘어서야 청와대에 도착했다.

이번 산불이 최악의 상황으로 번지지 않아 망정이지 정부와 공중파 방송들의 부실한 대응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게 미래의 더 큰 재앙을 피하는 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