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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칼럼

사람 반쯤 죽여 놓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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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푸코의 유명한 저작 '감시와 처벌'은 반역죄인을 교살하는 끔찍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독자들은 여섯 마리 말(馬)에 묶인 사형수의 사지가 잘려나가는 광경에 갑자기 초대된다. 묘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동원된 말이 그런 역할에 생소했던지 사형수가 제대로 육시(戮屍)되지 않자 사형집행인은 유황불에 달군 쇠집게로 숨통을 기어이 끊어 놓아야 했다. 공개처형을 보러 몰려든 구경꾼들은 공포에 떨었다.

조선에도 이런 공개처형이 자주 있었는데, 말 대신 소를, 쇠집게 대신 낫과 작두를 썼다. 우리가 즐겨 읽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도 궁정반란 역모죄로 참수형을 받아 잘린 목이 남대문 망루에 한동안 걸려 있었다. 현대사회에서 이런 끔찍한 신체형은 사라졌다. 대신 교정과 감화라는 은밀한 방법으로 바뀌었다. 교살의 잔인성이 오히려 구경꾼들의 동정심을 유발한다면 처벌 정당성이 약화되고 심판자가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그래서 위험천만한 범죄자일수록 겹겹이 차단된 장소에 격리시켜 매우 정교한 교화기술을 적용한다. 신체가 아닌 정신이 처벌 대상이 된 것이다.

현대차그룹의 총수 정몽구 회장에게는 어떤 처벌이 온당한가? 비자금 조성과 불법 증여가 경제 질서를 해치기에 단죄받아야 함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61일 동안 격리시킬 만큼 위험천만한 인물일까? 61일 동안 월드컵 행사장에서 한국차의 브랜드파워를 키울 기회가 박탈되었고, 체코와 미국 현지공장의 기공이 늦춰졌다. 가뜩이나 환율 하락으로 수출산업이 어려워진 판에 자동차 수출시장에 악재가 발생했다. 울산시민과 협력기업인 수만 명이 탄원서를 냈던 것을 보면 위험천만한 것은 오히려 그의 '신체의 결박'인지 모르겠다.

중죄를 지은 정 회장을 비호하려는 뜻은 없다. 이참에 황제적 경영구조를 바로잡아 기업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미래지향적 비판도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가 아니더라도, 방법은 졸렬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해당 기업이 국민경제의 불꽃을 지펴 온 세계적 업체이고, 막말로 그가 후안무치한 날강도나 위험천만한 살인마가 아니라면, 법집행 방식에 유연성을 기할 수는 없었을까? 가령 미국의 GE 회장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가정하면 미국 법정은 수사상 공정성과 신속성을 위해 신체 구속이라는 과격한 방식을 택했을까? 기업 이미지에 사활을 거는 세계화 추세에서 구속 수사 혹은 격리라는 '정신적 처벌'은 교살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다. 며칠 전 법정은 경제 악영향을 줄이고, 증거인멸.도주의 위험이 없다는 뒤늦은 판단 아래 그를 가석방했다. 어쨌거나 국민의 희망브랜드 하나가 그렇게 손상되면서 68세의 노구는 주저앉았을 것이다. 기업주에 대한 처벌이 기업에 대한 타격이 돼서는 곤란하다.

법치주의는 민주정치의 원칙인데, 사안이 경제정치라면 탄력성이 필요하다. 법치의 기본정신을 훼손하지 않고 처벌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고단수의 정치를 기대한다면 무리일까? 불법행위에 대한 단순한 처벌을 넘어서, 내부고발이 생겨날 만큼 부끄러운 불신 구조를 청산케 하고 총수의 뚝심도 살리는 그런 방법 말이다. 현대차 수사에서 정치는 법치 뒤에 숨어 불구경하듯 했다는 사실은 안타깝다. 쓸데없는 곳에 쓸데없는 간섭을 수없이 자처해 온 정치가 왜 이 사건에는 개입불가 원칙을 지켰을까?

국민경제에 충격을 가져오는 거대 경제 사안의 경우, 법치와 정치의 분리가 항상 민생 복리를 위해 좋은 효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마치 이 정권에서 시종일관 강조해 온 경제와 정치의 분리원칙 때문에 경제가 죽을 쑤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힘센 노조들도 설득하지 못하고, 서민경제도 챙기지 못한 게 이 정권이다. 그런데 어느 집권 실세가 "경제에는 성공, 민생에는 실패"했다는 알쏭달쏭한 말로 국민을 헷갈리게 한 그 시점에서 정 회장의 보석신청을 허가한 변은 '경제'였다. 사람 반쯤 죽여 놓고 말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