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반성 없이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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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인호】지식이 힘이라는 말은 상식이다. 개인이고, 사회 공동체이고 지성의 적극적 개발과 효율적 활용 없이는 살아 남을 수 없는 것이 특히 경쟁이 심한 현대 사회의 현실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금, 아니 해방이래 지금까지의 우리 대한 민국 역사 속에서는 바로 이런 상식이 정말 상식으로의 힘을 발휘하고 국가 정책과 사회운동의 구체적 양상으로 그 힘을 드러내 왔는지 묻고 싶다. 지금 우리민족이 직면하고 있는 역사적 위기의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지성의 고갈과 정신적 궁핍이 아닐까 한다.

<출세의 도구로만 인식>
학력을 중시하기로 세계 으뜸 가는 우리가 범해 온 가장 근본적 잘못은 지성의 의미를 지나치게 기능 주의적으로 파악했다는데 있었다. 국가 정책의 관리자들이나, 국민 개개인이나 마찬가지로 지식을 사회개발이나 출세의 도구로만 인식했지 지력의 함양이 그것 자체로서 갖는 보다 깊은 의미, 곧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어 「사람」으로 구실하게 끔 길들이는 작용은 간과해 왔던 것이다.
곧 양식과 양심의 관리라는 면에서 지식이 발휘하는 힘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우리의 교육에서는 너무도 소홀히 되어 왔기 때문에 인간성으로 본다면 못 배운 사람이 차라리 배운 사람보다 낫다는 아주 깊은 의미에서의 반체제적 인식이 여론의 저류를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며, 정치 체제 뿐 아니라 모든 전통적 가치체계를 일단은 부정해 본다는 극단적 허무주의가 판을 치게된 것이다.
국가 정책적 차원에서 볼 때 지성의 속성에 대한 몰이해는 오래 지속되어온 군권 지배 체제의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지성에 대한 도구적 개념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물리적 힘이나 조직의 힘만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적 생활과 직접 관계되지 않은 지식은 무용지물이며 인문학자들은 한낱 기생충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경제적 발전을 위해서는 육체노동과 지식의 실용성을 경시하는 「사농공상」을 단순한 분업이 아니라 신분상의 위계질서로 파악하는 봉건적 의식구조를 청산해야 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우리는 흑백논리에 빠지는 오류를 범했지 않은가 싶다.

<지금까지 착과해온 것>
인간이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도 동물이나 악마로 전락하지 않고 사람으로서의 감각을 잃지 않게 하는 힘은 경제적 생산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인문교육에서 오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회가 공동체로 존속할 수 있도록 묶어놓는 사회적 합의의 도출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살피거나 경제적 손익의 계산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내면적 삶과 사회적 삶에 관계되는 기본문제들을 도덕적 차원에서부터 구명하며 대 원칙의 바탕 위에서 현실적 대안을 마련하려고 몸부림치는 지식인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간과해 온 것이 바로 이점이다. 지식인들이 창출해 놓은 가치체계가 사회에서 널리 공감을 받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가 이루어질 때 사회는 결속되며, 역으로 지식인들의 자발적 활동이 체제 지지쪽 보다 체제 부정적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 사회는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심도는 그런 점에서 크게 우려할 만한 것이다.
그에 대한 물리적 치유책은 일시적으로는 효과를 발동할 수 있다 해도 궁극적 대안이 될 수는 없다. 학생들의 좌경현상, 교원노조의 결성, 재야 학술단체의 범람, 이 모든 현상은 결국 기존의 체제 속에 편입되어 있는 지식인들이나 교육자들이 그들의 구실을 제대로 해오지 못했다는 고발인 것이다.

<도덕적-지적 권위 회복>
단시일 내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때문에 더욱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일은 도덕적·지적 권위 체계의 회복을 위한 노력이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대중운동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공통 분모는 결국 도덕적 선명성에 대한 요청이며 그것이 파괴 아닌 갱생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도덕적 선명성에 지적 선명성이 배합될 때뿐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고매한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나 세력이라 해도 지적능력이 결핍되어 있으면 독단에 빠져 엄청난 폐해를 가져 올 수 있으며 역으로 도덕적 선의지의 뒷받침이 없는 도구적 지성의 소유는 엄청난 부패를 가져옴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양식과 양심의 수호자로서의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사회의 비극은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하나의 실천의지로 나타나야 할 양식과 양심이 둘로 갈라져 서로 으르렁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면에서 본다면 지식인들 사이에서의 기회와 자원의 독점 현상은 경제계에서 보다 더욱 심각한 병폐이며 그것은 지식인 세계의 심한 부패와 지적 권위체계 전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지식인들 사이에서의 이념 대립은 사실 따지고 보면 이념으로 포장된 무식과 폭력, 또는 지성을 위장한 냉소적 이기주의와 진정한 지성사이에 가로 놓여있는 심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 함이 세계 전반에 걸친 혁신운동의 추세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배웠음을 자처하는 모든 사람, 특히 체제 안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지식인들의 뼈저린 반성 없이는 우리 민족이 탄 배가 풍랑을 견뎌낼 수 있는 무게 중심을 가질 수 없음이 이제 너무도 분명하다. <서울 대교수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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