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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사치(奢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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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오페라는 사치다. 돈을 벌지는 못하면서 많이 쓴다. 전석 매진을 해도 제작비의 반을 건지기 힘들다. 동원되는 사람과 물자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연하면 할수록 적자가 늘어난다. 이 적자를 감당하려는 의지가 없는 곳에서 오페라는 사치다. 분에 넘치는 호사가 사치의 말뜻이라면 그렇다. 재정적 지원 없이 오페라는 불가능하다. 보통은 국가나 도시가 이 지원을 맡는다. 오페라에 공공적 성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처음으로 오페라를 보았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당시의 시민회관에서 본 플로토의 ‘마르타’였다. 그 때의 오케스트라 소리와 합창소리, 무대와 의상과 분장, 아리아를 부르던 테너의 목소리 등이 아직 내게 생생하게 남아있다. 캄캄하고 꿀쩍거리는 달동네 골목을 걸어 집에 돌아오면서도 오페라에서 보았던 화사한 장면과 아름다운 노래가 눈에서 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꼭 오페라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당시에 읽었던 ‘로빈 후드의 모험’ 중의 한 에피소드를 주제로 하리라 계획도 세웠다. 그 날 이후 오페라에 대한 나의 동경은 멈추지 않았다. 위촉도 없이 오페라를 두 편 썼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고 또 혼자 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어서 위촉 없이 쓴다는 것은 무모한 일인데 그랬다. 그만큼 동경이 컸다. 그 결과였는지 학교에서 은퇴할 즈음 오페라단 단장이 되었다. 단장이 되고 나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으니 ‘오페라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삶의 향기 4/2

삶의 향기 4/2

오페라만이 아니다. 순수예술의 공연들은 모두 적자를 면하기 어렵다. 소수의 스타급 연주가들을 제외한 실내악·합창·오케스트라·발레 등이 대개 그렇다. 그럼에도 규모 있는 도시들은 시민회관을 짓고 합창단·관현악단·무용단을 조직한다. 시민들에게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문화도시로서의 격을 갖추기 위해서다. 그러나 순수 예술단체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그 단체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예산에 훨씬 못 미친다. 어떤 도시들은 이 적자를 기꺼이 감당하면서 문화도시로 발돋움하여 영향력 있는 문화중심지가 되기도 하지만 처음의 의욕이 식어 돈 많이 드는 이 단체들을 짐스러워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도시는 공연사업 예산을 깎는다. 빈약한 예산으로 만드는 공연이 멋지고 화려할 수 없다. 당연 인기가 시들해지고 시민들이 외면하게 된다. 이 악순환이 계속되면 우중충한 이 단체들을 유지할 애정도 명분도 없어진다. 급기야 구조조정 같은 경영 원리가 동원되고 예술단체의 폐지나 통폐합이 시도된다. 마음이 없으면 예술단체는 골치 아픈 짐일 뿐이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일상을 떠나 나를 낯선 곳에 옮겨 놓고 다른 삶을 바라보기도 하고 나의 삶을 돌이켜보기도 하는 일이 좋다. 여행광도 있다지만 그런 정도는 아니고 다만 여행의 기회를 마다하지 않고 또 비용에 대해서도 관대하다. 여행에 마음이 설레지 않는 사람 눈에는 나의 이 기호가 사치로 보일지 모른다. “여유도 많다. 뭐하러 그 고생하면서 돈과 시간을 쓰고 다녀?” 사실 여행을 하면 ‘필요 없는’ 돈을 쓴다. 교통비는 물론이고 숙박비도 만만치 않다. 식사도 해야 하고 입장료도 낸다. 이 모두가 집에 있으면 생기지 않을 지출이다. 그런 지출을 하면서 얻는 것이라야 새로운 거리, 낯선 풍광, 다른 문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필요 없는’ 일 가운데 다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무엇이 있으니 여행을 간다. 예술단체를 폐지하려는 도시에 없는 것은 예산이 아니다. ‘필요 없는’ 일 가운데 있는 무엇을 찾는 마음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우리가 어머니에게 항상 양말이나 속옷 같은 실용적인 생일선물을 드리지 않는다. 가난한 어머니라고 왜 보석 박힌 브로치를 싫어하겠는가? 왜 품위 있는 식당에서의 외식이 즐겁지 않겠는가? 매일도 아니고 일 년에 한 번 있는 생일날에? 우리는 다소 무리해서라도 그 지출을 감당한다. 슬며시 떠오르는 지갑 걱정은 즐거워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잊게된다. 어머니도 “분에 넘치는 호사다. 필요 없다” 고 말하지만 브로치를 볼 때마다 즐거움을 되새기며 많은 가난한 날들을 견디며 살아간다. 어머니에게 그 브로치는 분에 넘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사치가 아니다. 세상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 일도 있다.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